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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경철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7
발행연도
2010.3
수록면
357 - 38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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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의 신분에 대해선 왕손설과 사족[6두품]설로 크게 나뉘지만, 낭혜화상의 예를 들어, 왕손설이 나온 배경을 추론하였다. 원측이 예전에 왕손이었으나 후에 6두품으로 편제된 모량부 박씨의 후손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왕손설과 사족설을 모두 받아들였다. 원측의 3세 출가와 15세의 유학은 단석산신선사의 미륵신앙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량부 박씨의 불교적 분위기와 원측의 구법의지가 반영되었다.
신문왕대 원측의 귀국요청이 있었지만 귀국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선 그의 출신 부인 모량부의 탄압뿐만 아니라 그의 일체성불설과 반대입장에 있었던 오성각별설의 백제 출신의 승려 경흥의 반대를 상정해 보았다. 원측에게 승직을 주지 않았다는 기록은 그의 제자인 도증의 와전이었다. 경흥은 원측과 달리 현장-규기로 이어지는 유식계열이었고 신라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오성각별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경흥은 자기와 반대 입장에 있었던 원측의 귀국을 바라지 않았으며, 뒤에 원측의 제자인 도증이 귀국했을 때도 모량리 익선아간의 사건을 빌미로 도증에게 승직을 제수하지 말것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 경흥은 도증 이후 편찬된 『무량수경연의술문찬』에서 규기의 저술을 34회나 인용하였지만 원측의 저술은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경흥은 자신과 반대 입장에 있던 원측의 저술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원측의 신분과 성씨
Ⅲ. 원측의 출가와 유학 시도
Ⅳ. 원측의 재당유학과 신라의 귀국요청
Ⅴ. 원측의 귀국여부와 경흥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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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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