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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정신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29호
발행연도
2007.11
수록면
71 - 9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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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에 가마 속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내어 만든 건축자재로서 건물의 부식을 막기 위해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기와는 도읍지인 개성을 비롯하여 평양과 경주 그리고 전국각지의 절터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으나 구체적인 생산실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기와에 청자유약을 입힌 청자기와까지 사용되고 있어 기와의 발전이 고려청자와 연계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와는 일반인의 수요보다는 주로 궁전이나 사원 건축에 사용되었으므로 그 생산 또한 국가적인 조영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기와 생산에는 가마를 만들고, 기와를 빚어 불을 때는 등 여러 단계의 공정을 거치게 됨으로서 일정한 조직체가 필요하다. 따라서 고려 또한 각지에 와소를 두어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정기적으로 공납하게 하였다고 판단된다. 기와를 생산한 지역은 전국적으로 나타나지만 고려시대 와소로서 알려져 있는 것은 永同郡의 栗谷瓦所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 외에 대전 구완동 요지도 와소에 포함시켜도 될 것 같다. 구완동 요지는 그 위치로 보아 촌개소ㆍ복수소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의 와소 또한 후기에 들어서서 소의 해체와 더불어 사라져 갔다. 이에 따라 원 간섭기에 들어서서는 私匠들이 개인적으로 기와를 생산하여 판매하였다. 그러나 궁궐이나 사찰 등 정교한 조각이 필요한 기와는 국가 차원에서 생산할 필요성을 느껴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瓦署를 설치하였으며 이 외에 기와를 민간에까지 보급하기 위해 별와요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와장의 부역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생산의욕이 저하되어 품질은 날로 조악해졌다. 또한 기와생산에 필수적인 나무의 공급은 선군이 담당하여 선군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어 이탈하는 자가 늘어났다. 이에 조선왕조는 수차례 별와요의 치폐를 거듭하였고 그 과정에서 관요는 자연히 그 기능을 상실하여 국가차원에서의 기와생산은 사라져갔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고려시대 기와생산과 와소
3. 소의 해체와 조선 전기의 기와생산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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