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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덕형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30호
발행연도
2009.7
수록면
209 - 243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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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원산송이 발생한 조선후기였던 18c에는 임금의 명에 의해서 山訟사건은 엄중하게 처리 하라는 명이 내려질 정도로 산송은 이미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두 가문은 경기도 파주 분수원에 위치한 묘역 문제로 약 250년간 산송을 벌여왔다.
분수원산송은 산의 같은 줄기에 심지원과 윤관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있는 이유로 훗날 쟁송이 시작 되었다. 이곳 분수원에는 1111년 파평윤씨 윤관의 묘가 조성되었고, 1662년에는 청송심씨 심지원의 묘가 조성되었다. 그런대 청송심씨 심지원의 묘를 조성될 때 아래에는 이름 없는 古?이 한기 있었다. 이 묘를 파평윤씨 측에서는 윤관의 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가문에서 훗날 묘역지의 독점적인 사용권을 주장하며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발생한 분수원산송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 아직까지 분명한 해답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왜 두 가문이 이렇게 오랜 기간 산송을 벌여야만 하였던 원인이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현재 나타나있는 자료로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분수원 산송의 실체를 풍수지리사상을 통해서 파악해보기로 했다. 첫째 분수원 산송이 발생한 지역의 풍수지리 형국을 살펴보고, 둘째 18세기 후기의 심지원과 윤관의 묘역 배치와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셋째 고려시대에 조성된 윤관의 묘와 조선후기에 조성된 심지원의 묘가 만들어질 때 사대부들이 享受하고 있었던 풍수관에 대해서 추론해 보았다. 그 결과 고려와 조선에서 사용되어지는 풍수론은 차이가 있었고, 같은 조선시대에서도 개국초기와 조선후기에 사용되어지는 풍수론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숙종조에 새롭게 만들어진 분묘의 범위규정이었던 용호의 범위규정은 당시 사대부들의 위선사업에 이용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더구나 사대부들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과는 다른 성리학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던 시기여서 그 여파는 더욱 크게 확산되었고 이것은 곧 산송으로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전개된 분수원산송은 최근 두 문중의 합의로 끝을 맺었다. 그 결과의 후속행위로 이어진 청송심씨의 이장 현장에서는 관 속에 물이 가득 차있었던 것을 보았다. 이것은 분수원 묘역지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에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는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수원산송은 분묘의 독점적인 사용을 위해서 근 250여 년간 이어졌다. 이것은 결국 조선후기 사회현상의 변화가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그 사상적 기저에는 풍수관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결국 분수원산송도 이런 범주에 놓여 있어 벌어진 산송으로 판단된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수용한 풍수론
3. 분수원 묘역과 그 주변의 풍수 분석
4. 분수원산송에 내재된 성리학적 풍수관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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