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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小宮 秀陵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8집
발행연도
2011.4
수록면
119 - 15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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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정보라는 측면에서 羅日外交나 勸日外交가 일본 입당사절의 파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피고 그를 통해 견당사 연구에서 인식론적인 문제를 고찰한 글이다.
발해가 전달한 당의 정보는 일본 입당사절의 파견이나 중지를 결정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일본 入唐大使 藤原淸河의 귀국문제는 발해가 전달한 安史의 亂에 관한 정보에 의해 부상하였다. 이후 藤原淸河를 맞이하러 가는 입당 사절이 편성되었으나, 귀국을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安史의 亂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실제로 王新福이 전달한 전란과 교통로에 대한 정보에 의해 입당사절의 파견이 중지되었다.
또한 신라가 전달한 당 정보도 일본의 입당사절 파견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769년 신라는 일본에 唐消息을 전달하였는데 이것은 羅曰間의 외교마찰을 완화시킬 정도로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 후에도 신라가 藤原淸河의 정보를 일본에 전달함으로써 일본의 입당사절 파견이 계획되었다. 또한 일본은 입당사절을 파견할 때 당의 소식을 얻기 위해 신라 로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결국 일본은 신라나 발해의 당 정보를 통해 입당사절의 파견을 결정하거나 중지하였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정보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對唐外交가 신라나 발해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의 입당사절 파견에 신라나 발해가 영향을 끼쳤다는 인식은 없었다. 그 이유는 근대에 만들어진 중국에 대한 대항 의식, 한반도에 대한 정체성론적 인식에 기반을 둔 肥大한 遣唐使像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본의 外政이 2국간에서만 전개되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과의 상호연관성이라는 인식이 捨象되었던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발해가 전달한 唐 情報와 藤原淸河의 귀국
3. 8세기 말엽 羅日外交와 唐 情報
4. 遣唐使像과 外政, 內政의 문제
5. 맺음말
附表
曰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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