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훈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38집
발행연도
2011.4
수록면
155 - 196 (4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조선시대 교린(交隣) 외교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통신사의 일본 파견에 대해 한일 양국에서는 주로 정치적인 득실이나 문화적 영향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의 통신사들이 일본에 가서 6개월~1년 정도를 체류하면서 치루는 각종 외교의례를 비롯한 일본측의 접대란 사실은 하나하나의 외교행위에 각각 경제적 행위가 수반되는 것이었다. 조일 교린관계란 서로간에 ‘대등’을 이념으로 하는 외교관계라 할 수 있는데, 이 관계를 유지하지 위해 서로간에 과연 얼마만큼의 비용(費用)을 필요로 했는지, 이 ‘비용’이라는 관점에서 근세 한일관계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1811년의 신미통신사를 대상으로,
첫째, 조일간에 서로 예물을 주고받는 외교 상대는 어떤 사람들이며,
둘째, 조선의 통신사들이 가지고 간 예물의 품목과 수량은 어느 정도였는지,
세째, 이에 대해 일본측이 준비하는 회답예물의 품목과 수량,
넷째, 일본측의 회답예물 가격의 산출과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는지 등,
예물 교환이라는 외교의례 행위를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해 봄으로써, 예물의 교환이 근대 이전 교린외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본 것이다.
그리하여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811년의 신미통신사 때 공?사예단을 예로 들면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가져오는 예단(人參?虎皮?鷹?木綿 등)에 대해 품목마다 단가를 계산하여 그 총 액수에 상응하는 물건과 수량을 회답예물(色琥珀?水洗い?茶罐?蒔繪提重 등)로 주었다. 수량면에서 볼 때 1811년의 신미통신사는 조선측 예단 보다 일본측 회답예물 총액이 조금 더 많았다. 즉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어느 쪽도 크게 손해보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회답예물의 품목은 그것을 지급하는 일본쪽의 사정에 따라 품목이 임의로 정해지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19세기 초 花鳥雲鶴의 무늬가 들어간 吉祥文樣을 선호 하는 조선측의 취향이나 수요를 충분히 고려한 것이었다. 단 회답예물 품목에 대해서는 일본측에서는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조선측의 인식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었다. 더욱이 상대방에서 그 품목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접대를 충분히 받지 못한 것으로, 즉 손해보는 것으로 인식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일 교린 관계에서 통신사 파견에 수반되는 예물 교환이라는 외교의례는, ‘비용’이라 는 측면에서 볼 때 ‘同等價’를 전제로 한 경제행위였으며, 정치?외교상 어느 쪽도 일방적인 관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1. 분석 방법과 대상 및 자료
2. 1811년 이전 통신사의 일본 파견과 예물의 교환
3. 1811년 신미통신사가 준비한 예물
4. 1811년 신미통신사에 대한 일본측 회답예물
5. 일본측의 회답 예물 비용 산출과 선정
맺음말
曰文抄錄

참고문헌 (3)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349-0016987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