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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성용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2호
발행연도
2012.11
수록면
121 - 151 (31page)
DOI
10.17068/lhc.2012.11.15.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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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19세기 중후기에 있어서 센카쿠 열도(尖閣列島)/댜오위다오 열서(釣?島列嶼)1)와 해양경계에 관해 일본의 영토인식과 제도적 실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시기 동중국해의 섬과 암초들에 대한 영토성의 구성은 동아시아 해양공간에 있어서 중화질서가 해체되고 일본이 식민제국주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제 특징을 나타내준다.
첫째, 명치정부는 댜오위다오(釣?島)와 주변의 작은 섬, 그리고 암초들을 권역화하여 센카쿠 열도(尖閣列島)로 명명함으로써 새로운 영토에 대한 국가정체성을 부여하였다. 그 명명방식을 보면 기존의 중국식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 영국인들의 기록에 있는 용어를 번역해서 적용하거나, 새롭게 명명하는 방식 등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서 이 섬들을 행정적으로 새롭게 구역화하여 제도화 함으로써 중국과의 영토경계에 대한 정치?행정적, 지리적 경계를 확증하고자 하였다. 둘째, 19세기 중국은 유구국과의 해양공간을 산, 해구, 해수의 빛깔 등으로 그 자연경계를 분획하고 있었다. 센카쿠 열도(尖閣列島)/댜오위다오 열서(釣?島列嶼)에 있어서 츠웨이위(赤尾?)를 제외한 나머지 섬과 암초들은 유구 소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당시 영토화 과정에는 무인도와 무주지 개념의 분화가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 섬들을 국제법에서 말하는 무주지 보다 무인도로 인식하였다. 넷째, 명치정부는 영토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개인사를 국가사로 전환하는 전략을 행하였다. 고가 다츠시로(古賀辰四郞)가 섬을 탐사, 경영한 과정을 국가의 영토사로 전환시키면서 영토가 갖는 국가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섬들의 명명과 영토편입
3. 해양경계에 대한 상이한 인식
4. 비분화된 무인도ㆍ무주지 개념의 적용
5. ‘식민(植民)’을 통한 영토적 장소 만들기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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