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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윤정 (용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75·276號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37 - 60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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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명청자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제작 시기나 원인 등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뚜렷한 해석은 없는 상황이었다. 본고는 간지명청자의 형식 분류와 양식적 특징에 집중하였던 기존의 연구 방법을 벗어나서 고려 말기 명문청자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간지명청자의 제 작 시기와 원인을 파악해 보았다.
고려말기에 제작된 전체 명문청자의 명문 내용을 기준으로, 왕실 측근 세력 관련 청자, 도교 관련 청자, 干支銘청자, 儒敎義禮銘청자, 官司銘청자, 조선초 王室府 관련 청자 등 여섯 개 군으로 분류하였다. 멍문의 성격, 기형, 문양, 굽형태, 번조방법, 명문 위치와 표기 방법 등을 비교한 결과 시기적인 선후 관계를 확인하였다. 도교 관련이나 왕실 측근 세력 관련 청자는 충렬왕대(1274~1308)부터 14세기 1/4분기경에, 유교의례나 관사명청자는 14세기 3/4분기경에 제작되는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간지명청자는 14세기 2/4분기경에 해당하는 1329에서 135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려 말기에 제작된 전체 명문청자 중에 간지명청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용도나 사용처를 의미하는 명문이 표기되어 있었고, 모두 왕실과 관련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간지명청자의 경우 특정한 사용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왕실에서 필요한 청자를 통합적으로 관리하여 년 단위로 제작·수취하였고 왕실 倉庫와 같은 관사, 왕실 의례, 제사 등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1329년부터 1355년까지 그리고 1389년에만 청자에 간지가 표기되었던 원인은 왕실용 청자의 수취체제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1330년에 이루어진 왕실 창고의 관제 개편에서 새롭게 설치되는 糾正이 왕실 관련 관사에 貢納되는 청자의 수취 과정을 監檢[감독·단속]하는 방편으로 상감청자에 간지를 새기게 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보았다. 규정관은 年 단위로 수취되는 왕실용 물품의 수량과 수취 과정을 감독·검수하였는데, 간지의 표기는 해마다 수취되는 왕실용 청자의 전체 수량을 파악하고, 수취과정에서 관리들의 문서 조작이나 私取를 막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糾正이 혁파되는 1355년 이후에는 간지명청자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관사명청자들이 나타나는 점도 왕실 관련 관사로 납입되는 物色들이 더 이상 규정에 의한 監檢 과정을 거치지 않고 관사마다 독립적인 수취 체제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에 趙浚 등의 개혁 유신이 정권을 잡으면서, 己巳年(1389)부터 납공을 예전과 같이 한다는 창왕의 즉위 교서, 왕실 재정 창고에 朝官 설치, 糾正의 역할이 강조되는 등의 변화가 1389년에 ‘기사’명청자의 제작 배경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干支銘靑瓷의 성격과 제작 시기
Ⅲ. 고려말 명문청자의 時期別 수취 체제
Ⅳ. 干支銘靑瓷의 수취 체제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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