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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연구소 미술사논단 美術史論壇 第22號
발행연도
2006.6
수록면
89 - 12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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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는 부안 유천리 청자를 왕릉 출토품 및 관료였던 문공유의 무덤 출토품, 사찰관련 명문자료 등과 비교 검토하여 부안 칭자의 수요처를 명확히 했다. 아울러 강진요와 비교를 통해 부안요의 성격을 조명하고. 부안요의 운영 체제 및 시기 등을 밝혔다.
먼저 부안 청자의 왕실 수요는 명종(재위: 1170-1197. 몰년: 1202) 지릉 출토 청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 34ㆍ35ㆍ42), 희종(재위: 1204-1211, 몰년: 1237) 석릉 출토 청자(도 5), 혜음원지 출토 청자(도 43) 등을 통해 확인하였다. 부안 유천리 가마와 왕실의 깊은 관련성을 방증하는 데에는, 부안 요지에서 각종 용문 청자편들이 출토된 점과 용문이 장식된 매우 커다란 매병(높이: 86㎝,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도 30) 등을 참고했다. 대형 청자매병에 장식된 웅장한 용문은 왕의 위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용문 청자를 사용한 사람은 왕이거나, 아니면 왕과 견줄만한 위엄과 세도를 가진 사람이다.
요컨대 부안요에서는 왕실의 수요에 따라 왕실용 청자를 직접 제작하여 납품했다는 결론이다. 1170년 이후가 무인 집권기임을 감안한다면, 이 용문 청자가 왕의 세력과 견줄만한 무인 소유물로 제작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마디로 부안 유천리 청자는 왕실이나 귀족 관료 등 고려의 지배계층이 생활자기나 장식용 자기로 애용하던 도자기이다.
두 번째로 관료 귀족의 수요는 부안 유천리 출토 청자를 문공유 묘 출토 청자(115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 13ㆍ44)와 양식 비교함으로써 밝혔다.
세 번째로 사찰 수요는 「靑林寺」명 청자화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 45)과 청자종(1222) 등을 주 대상으로 하여 검증하였다. 이 청자 역시 부안 가마에서 제작된 것이 확실시 된다.
이 밖에도 부안 청자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많은 예들이 있다. 「癸卯」명 청자 기와(1123, 1183, 124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의 天堂과 관련되었다고 추정되는 「天」명 상감청자 접시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47) 등이 그것이다.
이런 편년예들과 명문자료들로 미루어 부안 청자가 왕실, 관료 귀족, 무인 집권계층, 사찰 등 다양한 수요에 따라 제작되었음이 분명해졌다.
부안요는 강진요와는 차별화된 운영 체제에서 요업이 진행되었다고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안요에 대한 기록이 없는 점, 부안 요지에서 연호가 발견되지 않는 점 등은 부안요가 강진요와 다른 점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도자기소로 등재되지 않은 무수한 기타 요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부안 유천리요 역시 자기소 등재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부안 유천리요의 운영 체제는 정기 공납, 수시 진상 등으로 청자를 제작했다. 그리고 부안요는 분명 중앙 관청의 관리, 감독을 받으며 왕실 청자를 다량 제작한 관요의 성격도 지닌다.
마지막으로 부안요의 개시 연대는 비색 청자와 세련된 기형으로 보아 11세기경부터라고
본다. 하한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전반으로 잡았다. 이러한 연대는 강화도에 있는 희종의 석릉 출토 청자와 최항의 무덤 출토 청자(1257) 등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외에 고려왕실에서 원나라에 바친 畵金靑磁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충렬왕 15년: 1289, 충렬왕 23년: 1297)과 세련된 금채청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도 좋은 근거가 된다.
이런 근거 자료들을 통해 고려 청자 최고의 세련된 양식은, 약간 도식화의 경향을 띠지만, 13세기 후반에도 지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고려 청자의 보편적인 추세는 아니다. 그리고 부안 청자에서는 쇠퇴 경향은 보이지만, 강진 청자와 같이 완전히 퇴락한 양식은 없다. 따라서 부안요는 14세기 중엽 이전에 폐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외교류 측면을 보면, 강진요와는 달리 부안요는 중국 월요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기 보다는 강진을 통해 받은 것이라고 짐작된다. 부안요는 여러 수요처에 최고급의 다양하고도 화려한 청자를 제작했던 매우 특화된 곳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부안의 요지
Ⅲ. 부안 요지 출토 청자
Ⅳ. 부안 청자의 수요
Ⅴ. 부안요의 운영 체제와 시기: 강진요와 비교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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