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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백옥경 (이화여대)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6호
발행연도
2014.11
수록면
271 - 310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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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김씨 계동공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역관 가문으로서 京畿道 楊州 지역에 世居하였으며, 족보와 종계 문서 등을 보존해 오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우봉김씨 종계문서들을 분석하여, 조선 후기 중인 집안에서 진행된 종계 운영의 한 사례로 제시하고자 한다.
牛峰金氏는 황해도 岑城 곧 牛峰현을 근거지로 한 성씨로서, 16세기 전후에 여러 개의 派로 分派하였다. 계동공파는 그중 원래 楊州派였다가 개칭한 계파로, 한양과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이 파에서는 金澳의 17세손 金繼仝을 중시조로 한다.
우봉김씨 계동공파는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문중을 형성하고 계파의 派祖, 派祖의 直系 血緣, 父系親 중심의 宗? 조직, 동일 친족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족보 작성 등에 관심을 보였다. 이에 양주 지역 先塋 정비와 祖先에 대한 제사 추진, 종계 설립, 족보 편찬 등을 진행해 나갔다.
그중 종계는 계동공파 문중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종계 설립은 계동공의 8대손 金慶門에 의해 주도되어 1732년부터 시작되어 1741년에 마무리되었다. 종임 등의 기본조직과 16개조의 규정 등 종계를 위한 틀이 이때 마련되었고, 位田도 구비되었다. 이 종계는 약 80여 년간 유지되다가 1828년 한 차례 재정비되었다. 계헌도 25개 조항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종계의 주요 기금은 수렴전의 형태로 각 구성원들에게 갹출된 금액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재정의 보완을 위해 관직진출 등의 경사가 있는 집에서 일정액을 납부하게 하는 규정도 신설되었다.
종계에서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구성원들의 혼·상례 부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사와 掃墳 등에 비해 혼상례 부조의 비중은 적었으며, 종계의 또 다른 목적이었던 친족 구휼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우봉 김씨 계동공파의 문중활동은, 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족 가문들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면모가 있었다. 다만 분명한 차이점은 여타의 사족 가문에서 빈번하였던 書院이나 祠宇의 건립, 文集 발간, 학교의 설립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18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는 서원이나 사우의 문중적 경향이 강해지며 濫設 현상까지 나타났지만, 계동공파는 역관 가문으로서 顯祖가 뚜렷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계동공파는 儒業에 종사하지 못하고 技術學으로 진출하여 역관으로 주로 활동했던 가문이다. 물론 이들도 士族들의 문화를 향유하였지만, 유학자를 배출하거나 유학에 근거한 학문적 권위를 가질 수는 없었으므로, 先祖의 追崇, 서원·사우의 건립 등 사족가문으로서의 강한 상징성을 갖는 행위들은 시행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종계 운영 규약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곧 사대부 가문에서의 규약에서는 유교적인 예의의 존중, 자녀 교육 등에 대한 언급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계동공파의 종헌에서는 전혀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이는 기술직 중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위상을 확보한 중인 가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목차

국문요약
1. 서론
2. 조선 후기 牛峰金氏 繼仝公派의 門中形成과 活動
3. 宗?의 설립과 그 경제적 · 인적 기반
4. 宗?의 규약과 운영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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