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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정신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34호
발행연도
2015.8
수록면
141 - 17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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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에 진위현은 수주 속현으로, 평택현은 천안부의 속현으로 있었다. 이들 지역에도 토성이 있었으나 지역세가 강하지 못하여 고려 초에 큰 세력을 떨친 것 같지는 않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들을 회유하였는데 당시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의 관심대상은 충주, 청주 그리고 진천 등이었다. 따라서 태조가 그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한 호족세력은 충주 유씨와 더불어 왕건의 10번째 비와 혜종의 비가 된 진천지방의 임씨세력이었다. 청주의 경우, 궁예에 의해 1,000여명이 사민될 정도로 반정부적이었다. 그러므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수차례의 순행과 축성, 그에게 협조적인 청주호족을 우대함으로서 민심을 회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평택지역은 임씨세력이 처음으로 거주하면서 각지로 분파된 중심지로서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지금의 평택지방은 경기도 영역이던 진위현과 충청도 영역이던 평택현이 합쳐진 지역이다. 이곳의 지리상 이점은 서해안으로 바로 통할 수 있어 중국과의 교역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평택임씨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설화가 있게 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평택현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墾田이 2234결 중 논이 3/5 정도이며 진위현은 간전 2841결 중 논·밭이 반반이라고 한다. 특히 진위현의 경우, 서거정은 “3도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사신과 빈객의 왕래로 백성과 아전이 번거로운 영접에 시달린다고 하였다. 평택이 크게 풍족한 지역은 아니었지만 이점이 오히려 각지로 뻗어나갈 토양을 조성해 오늘날 임씨는 10대 성씨 중 하나로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평택 임씨는 조양, 옥구, 예천 부안, 순창, 선산, 은진, 길안 등 전국에 퍼져나가 각 지역에서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아 중앙에 관원으로 등장하였다.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이주하게 된 원인은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많은 이유는 처가나 외가를 따라 가거나, 혹은 정치적 탄압을 이유로, 국가로부터 사패를 받거나 전쟁을 피해서 이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혹은 속현에 대한 주군현의 수탈을 피해, 혹은 흉년이 들어 살기 힘들어서, 혹은 빚을 피해 도주하기도 했으리라 생각되지만 확실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이는 평택 임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 살았던 주민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의 평택현과 진천 임씨
Ⅲ. 각 지역 임씨세력의 연원과 분포
Ⅳ. 고려시대 주민의 이주 사례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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