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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道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79
발행연도
2015.9
수록면
135 - 172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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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첫 왕성은 沸流水上에 소재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는 「광개토왕릉비문」에서 ‘山上’에 소재한 것으로 적힌 기록과는 직접 관련이 없었다. 비록 후대이지만, 고구려 최초의 왕성이 屹立한 ‘山上’의 五女山城이라는 인식은 생겨났던 것이다.
흔히들 평지성과 산성의 조합을 운위하면서 오녀산성과 하고성자를 엮어서 이해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양자간의 연결은 어려웠다. 비류수인 지금의 부이강과의 합류 지점에 소재한 나합성이 관련 있어 보였다.
산성자산성인 환도성을 3년에 축조된 위나암성으로 비정하여 왔다. 그러나 환도성은 198년에 축조된 성이므로 연대가 맞지 않다. 그러한 위나암성은 지형 조건을 비롯한 여러 요소를 놓고 볼 때 환인의 오녀산성으로 지목되었다.
고구려는 魏軍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폐허가 된 관계로 247년에 廟社를 새로 축조한 평양성으로 옮겼다. 이는 실질적인 遷都를 뜻한다. 문제는 평양성의 소재지였다. 313년까지 낙랑군이 평양에 소재했다는 관념 때문에 이 기록 자체를 신뢰하지 않거나 그 위치를 다른 곳으로 비정해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이는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낙랑군은 기실 1세기 후반경 한반도에서 축출되었다. 따라서 247년의 평양성 천도는 가능한 현실이었다.
고구려는 342년에 丸都城으로 移居하였다. 그러나 前燕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초토화됨에 따라 그 이듬 해인 343년에는 평양 동쪽의 黃城으로 移居했다. 371년에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백제군과의 交戰 중 전사하였다. 광개토왕이 399년에 평양성에서 신라 사신을 맞이한 것도 평양성이 실질적인 王城으로 기능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427년 평양성 移都는 일대 사건이라기보다는 평양성을 王城으로 확정 짓는 공식적인 선언으로 간주하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따라서 평양성 移都를 전후한 귀족들간의 갈등설은 재고해야 될 듯싶다.
427년에 移都한 평양의 거점성은 청암동토성이었다. 그렇다고 할 때 대성산성은 427년의 移都 이후 어느 때 축조된 성으로 간주된다. 이와 더불어 평양의 범위도 확대되어 이제는 대성산성 중심으로 시가지가 재편되었을 수 있다. 그 후 35년간의 공사 기간을 기울인 장안성이 완공되어 586년(평원왕 28)에 移都하였다. 그런데 안학궁은 고구려 말기의 別宮 정도로 간주하는 시각이 설득력 있어 보였다. 그럼에 따라 산성(대성산성)과 평지성(안학궁)의 조합이라는 고구려 都城 체제를 가리키는 공식은 성립이 어렵게 되었다.
무려 35년간이 소요되어 완공된 장안성의 축조는 고구려 도성체제의 劃期였다. 고구려 도성 체제는 巨大 羅城과 바깥 성벽만 7km가 넘는 大形 山城(대성산성)의 결합을 통해 6세기 후반에 완결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桓仁 지역의 王都와 集安 지역의 王城
III. 평양 지역의 王都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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