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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동주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15 겨울호 제38권 제4호 (통권 141호)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7 - 37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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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조에는 왕의 성덕을 운위하면서 민간에까지 기와와 숯을 사용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왕경의 태평성대를 다루면서 흔히 회자되는 내용이지만, 기와의 교체주기를 감안하면 이 기사는 와공(瓦工)의 실업상태와 등치된다.
기와는 막대한 연료를 소진하면서 생산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헌강왕대에는 민간까지 기와가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다. 수세기 동안 이루어진 소성 작업은 필경 삼림의 황폐화를 초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황은 신라 하대에 조업 중인 기와가마들이 왕경의 외곽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던 상황과도 부합한다. 더구나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사실은 연료의 효율적인 사용으로 비치지만, 이 역시 원거리 이동이 고려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생활용 목탄인 흑탄은 66%가 타 버리고 나서야 생산되는 것이다.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 먼 거리에서 수송했던 정황이 읽힌다.
신라 하대 왕경 주변에서 기와를 생산하는 여건은 그전과 비교했을 때 상당한 악조건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왕경 주변에서 기와가 마를 운영하던 장인들은 연료 문제와 수요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왕경에 기와건물이 민간까지 운집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이들은 새로운 삶을 구가하려 하고, 사찰이나 지방의 유력 호족에 투탁하여 그들의 거소를 기와로 장엄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적 자료가 바로 왕경에서 사용하던 것과 동범 혹은 유사한 디자인의 기와가 지방에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아울러 국외로 눈을 돌린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일본과 교관업무를 수행하면서 새 삶을 구가하였는데,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면서 다시 그들이 체득한 기술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에 전하는 869년 최악의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육오국(陸奧國)의 다하성(多賀城)과 부속 사원(寺院), 육오국분사(陸奧國分寺), 육오국분니사(陸奧國分尼寺)가 초토화되자 기와의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일본에서 교관업무를 수행하던 전직 와공들은 다시금 불려가 기와를 만들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신라 하대 실업상태에 빠진 와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생계를 잇다 벌어진 해프닝으로 보아도 그리 무리한 발상은 아닐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왕경 내 운집한 기와건물과 기와 생산
Ⅲ. 생존에 직면한 경장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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