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인천학연구 인천학연구 제21권
발행연도
2014.8
수록면
7 - 44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인천의 ‘송도’는 과거 ‘먼우금’이라고 불린 해안가이다. 조선시대에는 비랑·옹암·대진 등 어전(漁箭)이 설치되어 왕 실과 궁방 등의 주요 세수처(稅收處)가 되었고, 해안을 따라 형성된 광활한 갯벌은 가무락, 동죽, 맛조개의 산처(産 處)가 되어 주민들의 생활 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갯벌을 장차 대륙 침략을 준비할 식량자원의 보고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다. 즉, 수산 자원 보호와 합리적인 생산 기틀 마련이라는 미명 아래 여러 가지 통제와 간섭을 실행한 것이다. 일제는 1910년대 부터 영종도 등지에 양식시험장을 설치하는 등 갯벌에서 생산되는 어패류를 수산가공품으로 상품화하기 시작한??후,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수산자원 및 어업자 보호를 구실로 ?조선어업보호취체규칙?을 강화해 나갔으며, 1936 년에는 송도어업조합을 창립하여 포패(捕貝)어업까지 허가어업으로 전환시켰다. 송도어업조합은 단순히 어민들의??경제적 이익과 복리향상만을 위해 결성된 것이 아니라 자원과 어민 양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려는 식민지 권력의??속내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1937년 ‘송도’ 갯벌에 150정보에 달하는 대규모 조개양식장이 설치되었 다 하더라도 이는 4천여 명에 달하는 송도 주민의 경제적 안정을 이루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 다. 수많은 송도 주민들은 금어기에도 밀어(密漁)와 부정채취(不正採取)라는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활해 나 가기 어려운 영세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송도’ 갯벌에서 지속가능한 수산자원 개발과는 상반되는 간척과 염전 개발 등의 식민지 개발을 추구 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1920년대에는 300여 정보에 달하는 남동염전을 건설하고, 1930년대에는 9만 8 천 평을 간척하여 5만평에 달하는 송도유원지를 개발함으로써 식민지 개발의 정점을 찍는다. 이러한 식민지 개발??사업은 갯벌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행위였기에 갯벌을 생활의 근거지로 삼는 어민들을 더욱 곤경에 빠트렸다. 더구 나 이러한 개발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과도한 공유수면 매립 정책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47)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6-359-002363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