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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황인규 (동국대(서울))
저널정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 불교학보 제73집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141 - 164 (24page)
DOI
10.18587/bh.2015.12.7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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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산사의 조선시대 역사와 사격에 대하여 살펴본 연구이다. 그간 금산사의 조선 전기의 역사는 알려진 바 거의 없었는데 본고에서 나름대로 복원 시도하여 사찰의 역사 흐름을 가름하여 보았다. 본 연구의 성과는 다음과 같다.
태조대 무렵 양가도승통 종림이 금산사 장로로 있었다. 조선 태종 대 금산사의 주지도징이 비행을 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사원전과 노비를 환수받는 등 탄압을 당하였다. 그 후 세조에 의해 금산사의 5층 석탑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성종대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가 인근 승도 사장들과 더불어 탑을 중수하였다.
중종대 호남 유생들은 금산사에 회합하여 문묘 배향을 논의하였던 사실이 찾아지며, 임진 난이 발발하면서 금산사는 의승군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금산사에서 출가한 청허 휴정의 문도 뇌묵처영과, 최초의 의승군 봉기를 하였던 기허영규와도 조우하여 금산사를 중심으로 의승군 전투에 참여하였다. 영규와 조헌의 금산전투와 영규의 행주 대첩 등은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되어 정유재란시 왜군의 보복으로 금산사는 금강문, 노주 등을 제외한 전각이 전소 되었다.
전란이 끝난 지 3년이 지난 직후 금산사의 고승 수문과 천택 등에 의하여 무려 35년간의 중창불사가 이루어 졌으나 대사구만 복원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하지만 금산사는 호남 일대의 명찰로서 미륵전과 장육존상은 조선후기에도 국중의 으뜸이었다고 회자되었다. 임란후 금산사를 이끌어간 주요고승은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문도였는데 그 가운데 백곡처능을 제외하고는 청허휴정의 문손, 특히 편양파의 법손인 소요태능이나 중관해안, 환성지안, 남악태우 등이었다.
따라서 금산사는 조선초 이래 선종계 사찰이었지만 지안을 통해 볼 수 있는 바와같이 선종과 더불어 화엄이 아우러진 종풍을 지니면서 본래의 유가의 전통이 기저에 잠재되어 왔으며, 일제강점기 금강문에 편액에 미륵본부 도량이라고 했듯이 유가종풍이 강한 도량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금산사는 미륵의 장육존상의 도량이라는 자부심은 더욱 강조되어 조선말기에 한국의 삼보사찰 가운데 불보사찰이라는 설도 제기되기도 하였다.

목차

〈한글요약〉
Ⅰ. 머리말
Ⅱ. 조선 전ㆍ 중기 금산사의 중창과 사격
Ⅲ. 조선후기 금산사의 화엄법회와 불보종찰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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