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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세덕 (경주대학교)
저널정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 불교학보 제89집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101 - 123 (23page)
DOI
10.18587/bh.2019.12.8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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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금산사의 가람배치 변화와 조선후기 후원자에 대한 검토를 통해 창건기와 전성기를 걸쳐 오늘날까지 금산사 천년의 가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긴 시간을 세부적으로 모두 조명한 것은 아니지만 금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중창자인 진표, 혜덕, 조선후기 후원 세력까지 모두 검토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만들었던 금산사의 대략적인 모습을 밝혀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진표 율사가 창건한 금산사의 초창기 모습은 방등계단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을 이루고 있으며, 대체적인 형식이 지금과 다른 중문, 금당, 강당, 종루, 경루, 회랑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사원 가람배치의 형태로 추정하였다.
금산사의 전성기 가람은 고려시대 혜덕 왕사의 중창으로 시작하였으며 3원 가람의 기본형태가 이때 이루어진다. 금산사의 3원 가람과 관련하여 미륵신앙과 결부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다원 가람은 고려 왕실사찰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금산사 역시 고려시대 왕실사찰에 버금가는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에 충분히 다원 가람을 형성할 수 있다. 또한 이미 금산사는 초창기부터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사찰을 조영했기 때문에 고려시대 다시 미륵도량의 의미를 가람에 투영하여 일신할 이유가 없다. 금산사의 3원 가람 중 왕실사찰에서 등장하고 있는 경전을 인출하는 봉천원이나 수계의식 공간인 방등계단은 금산사의 높은 사격을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조선후기 금산사는 18세기 초반 무경자수의 기록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었으며 19세기 소치 허련의 금산사도는 무경자수의 기록보다 더 많은 건물이 등장하고 있어 끊임없는 복원불사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대체적인 한국의 사찰건축 흐름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가람의 확장은 일제강점기에 잠시 단절되어 주요 전각의 중수정도로 명맥이 이어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복원불사를 추진하여 전성기 대사구역에 버금가는 면모로 일신하고 있다.

목차

한글요약
Ⅰ. 머리말
Ⅱ. 진표 율사(眞表 律師)와 창건기 가람
Ⅲ. 혜덕 왕사(慧德 王師)와 전성기 가람
Ⅳ. 조선후기 중창세력과 가람배치 변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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