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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인욱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22호
발행연도
2016.6
수록면
39 - 7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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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百濟와 吳越의 관계는 늦어도 8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양국의 교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崔藝熙가 파견된 896년부터는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후백제가 일찍부터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과 함께 문화의 교류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신라를 종주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견훤의 입장에서는 당이 외교상대로 후백제를 선택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하고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오월을 외교상대로 삼아 문화교류 및 국제적 위상의 확보라는 실리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後高句麗(泰封)와 그 뒤를 이은 高麗의 성립 이후에는 이들에 대한 견제라는 현실적인 목적도 존재했다.
900년 이후의 양국 교류는 905년 6월에 逈微가 武州會津으로 귀국한 사례, 906년에 玄暉가 후백제 내의 포구를 이용해 渡唐한 사례, 908년 7월에 무주 회진으로 돌아온 慶猷의 사례, 909년에 무주 昇平으로 귀국한 麗嚴의 사례, 911년에 羅州의 회진으로 귀국한 利嚴의 사례 등을 통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오월은 후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927년에 있었던 후백제와 고려의 質子 사망에 대한 오월의 후백제 지지를 통해서 확인이 된다.
925년에 가면 후백제는 당시 새롭게 건국된 後唐과의 통교를 통해 외교관계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던 데는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잡은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었다. 후백제는 고려 견제를 위해 927년에는 거란과의 교류를 시도하기도 했다. 오월과의 단선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후당과 거란으로 외교의 다변화를 추구했는데, 이는 다각 외교를 통해 국제관계에서 안정을 추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란과의 교류는 후당과의 관계에서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후백제와 거란의 연합은 후당의 안보에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당은 이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고려에 힘을 실어주면서 후백제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후백제의 대외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933년에 있었던 神劍의 왕위 찬탈이었다. 그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견훤의 실각으로 인해 오월과는 틈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권 안정이 중요한 신검은 후당의 淸泰 연호를 사용하며 외교 노선의 변화를 꾀하였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후당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吳越과의 교류
Ⅱ. 북중국 국가와의 교류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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