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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성주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0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271 - 30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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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부터 시작된 두만강 유역 藩胡들의 반란은 임진왜란 후에는 새롭게 성장하는 누루하치[奴爾哈赤, Nurhachi] 및 부잔타이[布占泰, Bujantai]와 연계되기 시작하였다.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두만강 유역 진출은 그 지역의 여진인들을 자신에게 복속시켜 해마다 歲幣를 바치게 하는 간접적인 방식이었다.
조선에서 忽剌溫이라 부르던, 海西女眞의 울라[烏拉, 烏喇, ulai]부 汗(칸)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와 경쟁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동해안 연안 지역의 여러 여진인들을 복속시키려 하였다. 부잔타이는 東海女眞및 와르카[瓦爾喀],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조선의 번호들을 흡수하여 노동력과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하였고, 이에 조선의 번호였던 老土를 招致하는 등의 시도를 벌였다.
1603년부터 부잔타이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선의 번호를 침탈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은 조선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부잔타이는 조선의 鍾城鎭을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두만강 유역의 여러 鎭堡를 공격하는 동시에 두만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번호 부락들을 침탈하였다. 1605년에는 조선의 潼關鎭이 함락되면서 조선은 부잔타이의 군사가 주둔한 件退에 대한 征討를 감행하였다.
조선의 건퇴 정토는 실패하였지만, 이후 부잔타이의 職帖요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부잔타이에게 포로 송환과 조선의 경계를 침입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직첩 1백 장을 수여하였지만, 부잔타이는 번호 침탈을 멈추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결국 부잔타이에 의해 두만강 이북에 있던 縣城이 공격당하자 현성의 여진인들은 누르하치에게 귀순을 요청하였고, 이것은 누르하치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어졌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현성으로 진격하였으며, 이때 부잔타이는 군사 1만명을 보내어 이를 막으려고 하였다. 누르하치의 군사와 부잔타이의 군사는 조선의 경내인 종성진 烏碣巖에서 크게 싸웠고, 홀라온은 대패함으로써 결국 부잔타이의 두만강 유역 번호 침탈과 복속 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부잔타이의 두만강 유역 진출 시도
Ⅲ. 부잔타이의 조선 침입과 藩胡 침탈
Ⅳ. 潼關鎭 함락과 조선의 件退 征討
Ⅴ. 조선의 職帖 수여와 부잔타이의 실패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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