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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일례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85호
발행연도
2017.3
수록면
231 - 277 (47page)
DOI
10.37331/JKAH.2017.03.8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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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5세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묘지명의 서술 방식을 비교하여 당대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을 살피는 단서를 마련하였다. 연구 대상은 모두루묘지명과 그리고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의 묘지명이다. 모두루묘지명은 題記, 고구려의 국가적 기원과 출자, 모두루 가문의 출자, 모두루 조상의 공적, 모두루의 행적과 같은 내용 구조로 서술되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의 안악3호분과 덕흥리고분의 묘지명은 묘주의 이름, 사망일, 묘주가 역임한 관직, 사망시 묘주의 나이와 같은 개인적인 내용이 서술되었다. 모두루는 북부여에서 출자한 고구려 건국세력의 후손이다. 그리고 모두루의 묘는 국내성 주변에 조성되었다. 반면 안악3호분의 묘주 동수와 덕흥리고분의 묘주 진은 모두 중국계 망명세력이다. 망명 후 동수와 진은 평양 인근에 정착하였고 자연스레 고분도 평양 지역에 조성되었다. 그러한 차이를 반영한 결과인지 모두루묘지명과 안악3호분 · 덕흥리고분의 묘지명의 서술 방식이 확연하게 다름을 확인하였다.
모두루가 활동하던 당시 평양이 특별한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모두루의 노년, 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당시 평양과 황해도 지역에는 이전부터 강한 토착 기반을 보유하던 이들이 건재하였다. 여기에 동수, 진과 같은 중국인 망명세력까지 가세하여 평양과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러 장수왕 60년 무렵, 귀족세력 간의 정쟁으로 정치가 혼란스러웠으며 그로 인해 귀족세력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다. 大臣과 强族/彊族이 살육되었고, 평양세력인 ‘樂浪諸郡’과 망명세력인 ‘馮族士馬’ 역시도 불만을 품은 세력으로 언급되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속에서 북부여 출신 모두루의 묘지명에는 고구려 시조 추모를 도와 고구려의 건국부터 모두루까지 헌신하여왔던 모두루 가문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나아가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모두루 가문의 치적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중요한 정치세력인지를 강조한다. 결국 모두루묘지명에서 고구려 시조 추모를 호명하고 북부여를 강조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인 목적을 지녔던 것으로 분석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4-5세기 고구려의 묘지명 검토
Ⅲ. 4-5세기경 중국의 묘지명 양식
Ⅳ. 시조 추모와 북부여 呼名 배경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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