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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고수연 (U1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82輯
발행연도
2017.4
수록면
119 - 168 (5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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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逆獄推案』에는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에 가담했던 반란군의 供草가 모두 실려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따라서『무신역옥추안』에 실린 반란군 291명의 공초를 분석한다면 무신란 반란군이 士族 중심이었는지, 아니면 軍官 · 奴婢 등 하층민이 반란군으로 큰 역할을 했는지를 검토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기존에 혼용되어 쓰이던 무신란의 성격, 즉 무신란을 붕당정치 차원에서 파악할 것인가,민중운동의 일환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시각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목적을 가지고『무신역옥추안』을 분석한 결과,첫째,『무신역옥추안』에 기록된 반란군의 職役을 보면 291명 중 미상 86명을 제외하면 사족이 173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무신란 당시 사족이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고 한 연구시각, 즉, 무신란을 붕당정치 차원에서 파악한 연구시각은 맞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사족 외의 직역으로는 군관 6명, 중인 10명, 양인 4명, 노비는 12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노비는 대개 주인인 사족의 단순심부름을 하였다. 따라서 하층민이 반란전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는 한 연구시각, 즉 무신란을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한 연구시각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셋째,『무신역옥추안』에 기록된 반란군이 많이 살았던 지역인 여주 · 용인 · 충주 지역을 검토해 본 결과 그 지역의 반 노론계 2~3가문의 친척이 같은 당파와 인척으로 연합하여 반란에 가담하는 양상을 볼 수 있었다.
넷째,『무신역옥추안』에 실린 본관이 같은 가문으로는 淳昌趙氏, 驪興閔氏, 羅州羅氏, 泗川睦氏, 全州李氏, 潘南朴氏 순이었다. 당색으로 보자면 순창조씨 · 여흥민씨 · 나주나씨 · 전주이씨는 南人계, 사천목씨 · 반남박씨는 少論 峻少 계열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남인인 순창 조씨와 여흥민씨, 나주나씨와 전주이씨는 인척지간이었다. 특히, 기존 연구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에 세거하던 남인 사족이 가장 많은 수의 친척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1727년 丁未換局으로 서울의 소론 준소계열의 반란동력이 약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지방 세거 남인 사족들이 가장 많은 친척을 동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컨대, 무신란의 전개에 하층민의 가담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확대 해석하여 무신란을 민중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무신란은 사족, 특히 남인과 소론 준소계열 사족이 중심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지역에 세거한 남인들이 인척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고, 가장 많은 수의 친척을 동원하고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무신역옥추안』의 사료적 가치와 추국 현황
Ⅲ. 『무신역옥추안』에 수록된 반란군 분석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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