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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前澤和之 (上野三碑世界記憶遺産登録推進協議会) 오택현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목간학회 목간과문자 목간과문자 제18호
발행연도
2017.6
수록면
137 - 160 (24page)
DOI
10.35302/wdis.2017.06.18.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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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渡来文化의 하나인 초기 石碑에 대해 현존하는 18점 중 3점이 모여있는 群馬県 高崎市의 山上碑(681年) · 多胡碑(711年頃) · 金井沢碑(726年)의 형태 · 비문을 중심으로 그 <전파-수용-전개> 양상을 검토하고자 한다.
현지의 승려와 불교신앙자가 건립한 山上碑과 金井沢碑는 그 지역의 安山岩인 自然石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형태는 신라의 대구 塢作碑 · 南山新城碑 제1비와 유사하다. 그리고 이 지역에 새로운 郡이 성립된 사정을 기록한 多胡碑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砂岩을 가공해 笠石 · 碑身 · 台石으로 구성된 정돈되어진 형태로 신라의 진흥왕순수비인 磨雲嶺碑 · 北漢山碑와 유사하다. 이들 형태를 비교해보면 석비는 7세기 후기부터 8세기 전기에 이 지역에 도래했던 신라의 사람들이 가지고 온 정보를 이 지역의 유력자가 수용해 받아들이고, 石材와 형태 등 碑文의 표기와 刻字 방법에 창작력을 가미해 건립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続日本紀』에 이 시기 僧 · 官人을 포함한 다수의 신라에서 사람들이 주변지역에 이주했다는 기사가 있다는 것에서 증명된다고 생각된다.
이것들 石碑가 건립되었던 지역은 5세기 후기에 말의 사육 기술과 함께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가져온 이주된 유적이며, 6세기 후기~말기의 고분의 부장품에서도 중국·한반도에서 가지고 온 다수의 문물을 살펴 볼 수 있다. 또 오래 전에 성립되었던 韓級이라는 지명과 도래인이 창건했다고 하는 辛科神社가 현존해 있다. 더욱이 『続日本紀』의 기사와 출토문자 자료에 의해 신라에서 도래한 사람들의 후예인 子氏가 다수 거주하고 있던 것이 판명되었다. 즉 여기는 일본 열도에서 초기 석비의 문화가 수용된 보기 드문 지역 중 하나이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래 전부터 다른 민족과 공생하는 사회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도래해 온 새로운 문화의 가치를 일찍부터 이해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3 사례에서 보는 것같이 일본열도에서 초기 석비의 수용은 한반도 특히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중국의 풍습을 받아들인 것은 多賀城碑(762)와 浄水寺의 石碑群(790~1064)에 불과하고, 螭首 · 亀趺를 동반하는 형식의 석비가 만들어졌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 영향은 한정적이여서 일본열도에서 중국풍 석비의 건립 보급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렇게 동아시아 각지의 초기석비의 양상을 비교검토하면 사람과 문화의 교류 실태를 보다 精緻하게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목차

국문초록
I. 서론
II. 日本의 古代 石碑 상황
III. ‘上野三碑’를 통한 검토
IV. ‘上野三碑’에 대하여
V. 형태적 측면에서의 검토
VI. 碑文의 측면에서의 검토
VII. 신라와의 교류
VIII. ‘上野三碑’ 지역
IX.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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