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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정 (진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68호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71 - 112 (42page)
DOI
10.17647/jss.2017.08.6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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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태종-세종대 개성에 건설된 定宗과 그의 비 定安王后의 무덤인 厚陵의 조성에 내포된 정치적 의미를 태종대 정안왕후의 상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2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靖安君(태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는 정종의 입론에 따라 世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태종은 정종을 상왕으로, 정종비를 大妃로 추봉하였는데, 상왕과 부자관계가 수립됨에 따라 대비와는 의례적으로 母子관계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상왕과 대비가 전면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權知國事에 머물렀던 정종의 위상은 대명관계에서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태조의 후궁이 誠妃로 책봉되어 왕비의 위상이 부여됨으로써 유일한 대비로서의 위상도 약화되었다.
정종비는 사망 후 ‘定安王后’로 시호가 정해지고 ‘厚陵’이 개성에 건설되었다. 상례에서 ‘兄妻’나 ‘母’라 칭하는 것을 문제로 삼아 명나라에 대비의 사망을 알리지 않은 것은 嫡妃로서 태종의 母后라는 명분을 명나라에 그대로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종은 사망 당일부터 제사를 모두 섭행하는 등 상례의 전 과정에서 상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안왕후의 위상은 태조의 嫡長子로서 즉위하고 嫡長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에게 자신의 왕위정통성과도 관련되는 중요한 요소였다. 후릉의 건설 역시 정종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정안왕후의 졸기에 “上王의 嫡妃”임을 명시되어 있는데, 태종의 왕위 계승이 이로부터 연원하기 때문이었다. 태종 4년에 세워진 齊陵碑에는 태조와 神懿王后의 적장자인 정종의 위상과 정종과 대비 사이에 적자가 없어 태종을 세자로 삼았다는 태종의 즉위 명분을 충실히 정리하였다. 또한 신의왕후가 正嫡으로 응당 왕비가 되었어야 하는데, 개국에 앞서 사망함으로써 그러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하여 1차 왕자의 난을 정당화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후에도 端午와 秋夕의 제사를 정종이 직접 지낸 것은 신의왕후의 장자라는 위상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태종과 정종이 후릉을 한양이 아니라 개성에 조성한 것은 이곳에 있는 제릉과 여러 의례를 연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의왕후와 정안왕후의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신의왕후의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정종의 즉위 명분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태종 즉위와 定宗·定安王后의 위상 변화
Ⅲ. 厚陵 건설의 배경과 의미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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