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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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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동북아학회 한국동북아논총 한국동북아논총 제75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117 - 132 (1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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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7월 전국의 당원 50여명을 대표한 13명의 대표가 모여 창당된 중국공산당은 28년 후인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건국 후 66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은 G-2의 일원(一員)으로 미국과 더불어 국제정치·경제의 한 축(軸)으로 등장하였고, 그 사이 당원의 숫자는 50여명에서 8천5백여만명으로 증가하여 세계 최대의 정당(政黨)이 되었다. 창립당시 대표로 참석한 13명과 대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직·간접으로 참여한 사람들을「초기공산주의자(初期共産主義者)」라고 하는 바,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理想)은 1949년 건국으로 실현되었다. 진독수, 이대교, 모택동을 포함한 초기공산주의자들의 위치와 역할은 상이하였고, 그에 따라 노선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21년 창당이후 그들이 보인 각기 다른 거취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어떤 경우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변절하여 국민당(國民黨)에 투항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초기공산주의자들 간에는 창당을 지원한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두고도 노선의 갈등이 없지 않았다. 이른바 중국공산당의 자주성(自主性)의 문제인 것이다. 이 논문은 이처럼 창당을 전후하여 초기공산주의자들이 보인 역할과 그에 따른 상호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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