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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고용규 (고대문화재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중세고고학회 한국중세고고학 한국중세고고학 제3호
발행연도
2018.6
수록면
37 - 77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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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용장성(龍藏城)은 13세기 말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을 상대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던 대표적인 항몽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삼별초군이 진도에 도착한 후 궁전과 성곽을 축조하였다는 견해를 밝힌 이래 지금까지도 별다른 문제제기 없이 통용되어 왔다. 진도 용장성은 1985년 지표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분포현황이 파악된데 이어 1989~2017년 본격적인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土壘로 축조한 내성(宮城·宮牆)과 다양한 기능을 가진 건물지를 비롯하여 석성(石城)으로 된 외성(羅城)과 제사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유구(遺構)와 출토유물 등 고고자료의 분석을 통해 용장성의 축조시기와 사용 시기를 검토하고, 각 시기별 기능과 구조에 대해 살펴보았다.
내성(宮城·宮牆)은 외성 남벽구간의 협소한 곡간지(해발 57~90m)에 둘레 425m, 높이 1.5~2m 규모로 둘러싸고 있는 석심토축(石心土築)의 토루(土壘)와 3m 높이의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 장장형의 내부는 남고북저형의 곡간지를 18단의 계단식으로 정지하여 구획한 후 건물을 배치하였다. 본래 9세기 말~10세기 초의 나말여초기에 창건하여 운영되어 온 금사사(金沙寺) 또는 대사(大寺)의 산지가람(D·E·F·P·G·H·I·M지구 하층)을 1270년(원종 10) 삼별초군의 진도 입거 이전에 폐쇄하거나 일부를 개조하고, 공간을 대규모로 확장하여 59개소의 건물을 배치하였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들 건물지는 사전기획에 따라 왕의 거주공간(A지구)과 회랑(B지구), 제사를 지내던 의례공간(P지구), 숙소공간(K·L·G지구), 취사공간, 기타 건물지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체계적인 배수 및 동선체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외성(羅城)에 해당하는 산성(山城)은 문헌을 근거로 복원한 규모는 둘레 38,741자(18.1km), 높이 5자(2.3m)이다. 그러나 바다와 접하고 있는 북벽과 서벽 및 동벽의 일부는 만을 제외한 곶(串)지형에만 축조한 까닭에 실제 규모는 13km이다.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조된 석성으로 동벽과 북벽, 제2서문지에서 출토된 「계묘삼월대장혜인(癸卯三月大匠惠印」명(銘) 기와와 공반유물로 보아 1243년(고종 30) 무렵에 축조되어 해도입보(海島入保用) 산성으로 활용되다가, 삼별초군의 진도 입거와 더불어 용장성의 외성으로 기능이 변화하였다. 따라서 진도 용장성은 내·외성으로 이루어진 2중 구조의 도성체제(都城體制)를 갖추었으며, 이듬해 5월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폐쇄되면서 기능을 다한 것으로 보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용장성의 구조
Ⅲ. 용장성의 성격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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