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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미애 (국립대구박물관)
저널정보
울산대학교 사학회 울산사학 蔚山史學 第十九輯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69 - 9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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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중산동고분군은 기원 2세기부터 7세기까지 긴 시간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목관묘(木棺墓) · 목곽묘(木槨墓)를 포함한 다양한 묘제가 확인된다. 또한 주거지(住居止) · 굴립주건물지(堀立柱建物址) 등의 취락지와 탄요(炭窯)와 같은 생산유적도 확인된다. 분묘와 함께 생산유적, 취락유적이 확인된다는 것은 유적을 형성한 세력이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산동세력은 달천철장, 철 생산의 연료가 되는 목탄을 만들 수 있는 산림, 울산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을 흐르는 동천강 등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철을 생산하고, 철을 주변의 다른 세력들과 교역하였다. 달천철장의 철광석은 비소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경주와 멀리 일본에서도 비소 성분을 함유한 철제품이 확인되어 해상을 통한 일본과의 교역도 활발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철 생산 및 철 유통을 장악한 중산동세력은 다른 세력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신라가 지방 세력을 지배하는 방식이 각 지방의 유력한 세력들에게 자치권을 주어 통치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보아 중산동세력도 철 생산세력으로 어느 정도 자치권을 인정해준 것으로 보인다. 중산동세력의 위계변화는 유적에서 확인된 목곽묘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목곽묘가 확인되는 것은 이미 목곽묘 축조 세력이 주변지역보다 위계가 높은 중심세력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4세기가 지나면 중산동세력은 신라의 생산체계 속에 완전하게 편입하게 된다. 철 생산 및 유통에 대한 모든 과정을 신라에게 통제 받고 관리 당한다. 그러나 철 생산량은 이전보다 더 많아 진다. 이는 중산동유적 일부와 매곡동에서 확인되는 측구부탄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신라가 조직적으로 측구부탄요를 조성하여 철을 대량으로 생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세기부터 철 생산은 양산이나 밀양지역으로 옮겨지게 되고, 중산동일대는 군사방어적 기능을 가지는 지역으로 변화하여 신라 관문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목차

머리말
1. 울산 중산동유적과 주변 환경
2. 울산중산동세력의 성격과 신라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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