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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貞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32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345 - 381 (37page)
DOI
10.31218/TRKH.2018.12.13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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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원의 제도였던 비칙치가 고려에 도입된 이유와 목적, 그 변화상을 고찰한 것이다.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무신집권기에 무신이 국정운영을 주도한 결과 국왕의 권위가 하락하고 국정운영 방식도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왕정복고 후 국왕이 곧바로 주도권을 갖고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국왕권의 약화는 국왕을 매개로 고려를 지배하려던 원의 지배정책과 배치되었다. 이에 원 세조는 충렬왕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충렬왕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한편 충렬왕에게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원 세조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던 충렬왕은 원 황제의 겁설로 널리 알려진 비칙치를 도입하여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시도하였다.
모든 관청이 국왕에게 보고하고 국왕이 모든 관청에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행정 및 국정운영 체제 위에서, 비칙치는 각 관청에서 보고하는 문제를 국왕과 함께 논의 · 결정하였으며, 국정운영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비칙치는 왕명출납을 담당한 신문색과 함께 궁궐에서 기무를 처리하였다. 그 결과 정책에 대한 논의 및 결정, 왕명출납이 한 자리에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궁궐에서 이런 일들이 처리됨에 따라 충렬왕의 의도가 국정운영에 잘 반영될 수 있었다.
비칙치는 충선왕 즉위년 관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가 충정왕 즉위를 전후하여 다시 설치되었다. 재설치 후 비칙치는 왕부 비칙치, 정방 비칙치 등 궁궐에 위치한 관청에 배속된 하위 관직으로 활용되었다. 즉 충렬왕대에는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담당하는 기구였다가 충정왕대부터는 관청에 속한 특정 관직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재설치된 비칙치는 인사 담당 관청의 하위직으로 배속되거나 비칙치에 임명된 관료가 인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비칙치를 인사 담당 관료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초기 사대부들이『고려사』를 편찬하면서 비칙치를 정방에 속한 문사들로 기록하였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내시제의 변질과 왕명출납
Ⅱ. 충렬왕대 비칙치의 설치와 기능
Ⅲ. 비칙치의 관직화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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