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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병욱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19 여름호 제42권 제2호 (통권 제155호)
발행연도
2019.6
수록면
129 - 170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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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상해는 조계지를 바탕으로 발전했는데, 특히 1860년대를 기점으로 동방의 런던, 혹은 동방의 파리로 불릴 만큼 크게 발전했기 때문에 서양 상인이나 선교사들의 활동무대였다. 오페르트는 이미 1850년대 초에 상해에 와서 상업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젠킨스 역시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상해에 와서 자랐기 때문에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이들은 ‘모험가의 낙원’인 상해에서 조선의 개항을 빌미로 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상해는 강남 선교지로서 예수회의 선교 관할 지역이었지만, 많은 천주교 선교회가 상해에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사무소를 차려 선교회 상해 대표부로 활용했기에 선교사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상해 대표부에 머물렀던 페롱 신부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 천주교 신자와 함께 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기획했던 것이다. 결국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단순히 19세기 동양으로 달려온 서양의 모험가나 상인의 사적 욕망의 표출이나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한 신부의 돌출적 행동이 아닌 19세기 서세동점 하의 다양한 정치·사회·경제·종교적 상황 속에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860년대 상해(上海) 조계지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
Ⅲ. 1860년대 상해(上海)의 천주교 상황
Ⅳ.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대한 중국의 대응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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