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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방상근 (내포교회사연구소)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57輯
발행연도
2020.12
수록면
7 - 34 (28page)
DOI
10.35162/rfkch.2020.12.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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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68년에 발생한 ‘남연군묘 도굴사건’에 참여한 조선인 신자가 누구이며, 이들이 왜 원정에 참여했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남연군묘를 도굴하기 위해 오페르트 일행이 상해를 떠난 것은 1868년 5월이었다. 이때 상해에 머물던 조선인 신자는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김여경), 송운오, 박복여, 이성집, 이성의 등 7명이었다. 이들 중 최선일·심순여·김학이 등 6명이 페롱 신부와 함께 오페르트의 원정에 참여했고, 그중 2명은 덕산에서 도망하였다. 최선일·심순여·김학이는 병인양요 때에도 향도 역할을 하였다.
상해에서 페롱 신부와 동행한 신자들 외에 김여강과 이돈호 등 덕산에서 오페르트 일행과 접촉한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페롱 신부가 조선에서 사목할 때 인연이 있던 신자들이었다.
1866년에 중국에 갔던 신자들은 ‘서양의 힘을 이용하여 박해를 종식시키고, 나아가 신앙의 자유까지 획득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병인양요가 바로 그러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군사력을 이용한 방법은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패하였다. 게다가 박해가 장기화되면서 상해의 선교사와 신자들 중에는 절망감에 빠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계획된 극단적인 방법이 바로 ‘남연군묘 도굴사건’이었다.
도굴 계획과 관련해서 상해에 있던 신자들은 처음부터 이 계획에 찬성한 부류, 나중에 설득된 부류, 끝까지 반대한 부류가 있었지만, 찬성한 부류의 선택이 조선 신자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목차

국문 초록
1. 머리말
2. 중국에 체류하던 조선 신자
3. 오페르트의 원정과 조선 신자
4. 신자들의 원정 참여 이유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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