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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구완회 (세명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7집
발행연도
2019.8
수록면
5 - 33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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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거믄돌 마을의 강씨 문중은 조선 중기의 명사인 강유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기억한다. 강유는 1627년에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척화’를 주장했고, 고위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19세기말 일본의 침략에 의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강씨 문중은 강유가 살던 옛 터에 문중의 강당[서당]을 짓기 시작했다.
강당은 1893년에 완공되었다. 이를 주도한 강순희는 당대를 강유가 살던 시기보다 위기상황으로 이해하고 조상의 뜻을 생각하고 몸을 닦으라는 뜻으로 ‘念修齋’라고 이름 지었다. 아울러 ‘중국문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이는 2년 뒤 봉기한 제천의병의 논리와 흡사하다.
염수재는 뒷날 을미의병기의 제천의병 지도자 유인석에 의해 ‘박약재’로 개명되었다. 이 무렵 강씨 문중의 젊은이들이 유인석의 제자로 입문했고, 의병 노선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강년을 비롯한 의병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의병의 재봉기를 의논했고, 이강년과 김상태 등 의병지도자도 박약재 부근에 묻혔다. 뒷날 의병론자들이 이강년의 전투 기록을 편찬한 곳도 이곳이다.
박약재 건립 때의 자료인 ‘서당계좌목’은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강씨 문중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려준다. 거믄돌에 거주하는 주요 계보의 자손들이 세대별로 참여했고, 그들은 자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조상의 뜻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박약재 건립에 참여했다. 결국, 강씨 문중은 강유가 실천했던 척사의 논리를 실천의 원칙으로 수용한 셈이다. 강씨 문중의 여러 인사들이 의병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목차

1. 머리말
2. 거믄돌의 지리적 조건과 강씨 문중의 내력
3. 박약재의 설립과 제천의병
4. 박약재 書堂稧座目의 분석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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