煬帝 廣은 ‘폭정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君主로 유명하다. 그러나 고려할 점이 있다. 煬帝의 인물과 사적을 기재한 基本史籍인 『隋書』, 『新ㆍ旧唐書』 및 『资治通鉴』을 쓴 史家가 대부분 唐ㆍ宋의 文人이다. 특히 唐初 太宗 때의 魏徵은 太宗에게 忠諫하면서 자주 隋나라 멸망을 거울로 삼았고, 魏徵의 정치경향은 煬帝의 단점을 더 많이 드러냈음을 배제하지 못한다. 五代와 北宋에서는 唐人의 觀点과 史料를 그대로 받아들여 여전히 唐代史家의 영향을 받아 이러한 추세가 더 심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수양제에 대한 재평가는 부수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隋煬帝가 귀순하는 서북방 이민족을 포용하고, 서역을 개통했으며, 서역 여러 나라와의 통상과 교류를 당 태종처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이다.
6-8세기에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 당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민족에 대한 포용성ㆍ개방성ㆍ국제성은 어떠한 역사적 조건하에서 시작되었을까? 貞觀 초기, 당제국과 서역과의 교역이 성황을 이루었는데, 중국에서는 견직물과 차와 종이가 교역품의 중심을 이루었고, 서역에서는 호탄의 옥과 바쿠샨의 청금석, 쿠챠의 硇砂, 티베트의 麝香ㆍ야크의 긴 꼬리, 페르시아 및 東지중해 지역의 金銀器와 유리제품ㆍ乳香ㆍ약품ㆍ융단, 인도 및 동남아시아로부터 후추ㆍ香木ㆍ보석ㆍ산호ㆍ상아ㆍ물소뿔ㆍ귀갑ㆍ쪽빛염료가 실크로드를 통하여 들어왔다. 장안에는 현란한 이란 문화가 번성하여 唐의 번영에 크게 공헌했다. 酒場에는 胡姬들이 많았으며, 胡俗이 크게 유행하여 女奴隸ㆍ胡旋舞ㆍ胡騰舞ㆍ西域 음악이 성행했다. 뿐만 아니라, 불교ㆍ조로아스터교ㆍ마니교ㆍ그리스도교ㆍ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전파되었다. 서역경영이 경제 문화면에서 이처럼 세계제국 당의 번영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번영과 포용과 개방이 수양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隋가 건국되었을 때, 북방에는 동돌궐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서역은 서돌궐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土谷渾은 河西回廊을 남북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隋文帝는 먼저 북방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돌궐에 대항하기 위해서 서역을 통치하고 있던 室點密系 西突厥과 동돌궐 숙질간의 상호 모순을 이용하여 그들을 분열시켰다. 서돌궐과의 교류는 隋왕조와 서역 국가와의 교류의 시작이며 군사ㆍ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603年 文帝 말기, 西突厥 達頭可汗의 군대가 漠北에서 패배하고, 隋朝에서 冊封한 東突厥 啟民可汗이 漠北을 장악하여 隋朝에 완전히 臣服했다. 604年 隋煬帝가 繼位했을 때는 북방 강역에서의 돌궐의 위협이 크게 減輕된 상황이었고, 煬帝가 西域경영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북방 강역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隋文帝의 말처럼 서역은 ‘얻어도 살 수 없는 먼 사막의 땅’이지만 북방 강역과는 달리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煬帝가 서역으로 진출하려는 목전의 계획은 ‘국력을 과시하고 서역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고, 교역을 확대해서 명마나 진기한 보물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隋煬帝는 秦始皇이나 漢武帝를 숭배하던 제왕이었다. 吏部侍郎 裴矩는 煬帝가 영토 확장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胡商들을 유인하여 각 나라의 風俗ㆍ습관ㆍ地理ㆍ形势를 듣고, 『西域圖記』 三卷을 지어서 御前에 바쳤다. 煬帝에게 “서역을 장악하고 있는 돌궐과 토욕혼을 정벌한다면, 병거를 동원하지 않고, 사신 파견만으로 서역 여러 나라가 조공하러 올 것”, “호족에게는 胡馬珍寶가 많다”라고 상주했다. 煬帝의 서역경영 과정을 보면 裴矩의 의견을 많이 받아들인 것을 볼 수 있다. 煬帝가 서역경영에 나서자, 서역과 중국 사이에 있는 토욕혼 정권을 정복해야 했다. 煬帝는 607—609年, 吐谷渾 政權을 궤주시키고, 臨羌城 以西, 且未 以東, 祁連 以南, 雪山 以北의 東西 四千里, 南北 二千里의 땅을 차지하여 吐谷渾의 故地에 鄯善(현재 新疆 若羌)ㆍ且末(현재 新疆 且末), 西海ㆍ河源(모두 현재 青海省 境內) 四郡을 설치하고, 鄯善郡 아래 顯武ㆍ濟遠 二縣을 설치했다. 또 且末郡 아래에는 肅寧ㆍ伏允 二縣을 설치했다.
당시 서역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였는데, 北道는 돈황에서 伊吾(현재 新疆 哈密)로 나가고, 中道는 高昌(현재 新疆 吐魯番),南道는 鄯善을 경유했다. 鄯善ㆍ且末군을 설치한 것은 西域 南道의 門戶를 장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天下의 輕犯罪者를 이주시켜서 땅을 개척하고 강역을 확장하여 戎夏를 혼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곧 西域 北道의 門戶인 伊吾를 경략하였다. 大業 4년(608년) 隋는 원래 있던 伊吾城 동쪽에 별도로 新城을 건립하고 1천명의 병사를 주둔시켜서 수비하게 하고 이곳에 별도로 互市를 설치했다. 610年에는 隋는 정식으로 伊吾郡을 설립하여 西域 경영의 발판을 확보했다.
이처럼 서역으로 가는 길을 확보함과 동시에, 서역 각국과의 교역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大業 三年(607), 隋煬帝는 吏部侍郎 裴矩를 파견하여 張掖의 互市를 전담하게 하였다. 당시 張掖은 西域 諸國과 互市를 열도록 隋煬帝가 지정한 城市로서, 많은 胡商들이 이곳에 와서 무역을 했고 民間 贸易도 활발했다. 황제는 郡과 縣에 명령하여 武威와 張掖에 사는 선비와 여자들에게 화려하게 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게 하여 서역 상인들에게 중국의 융성함을 과시했다. 또 외국의 상인을 불러들여 한 달 동안이나 端門의 거리에서 四方의 奇技異藝를 펼쳤고, 東市(풍도)에서 교역하고 싶다는 여러 蕃國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서역 여러 나라의 왕과 사신을 불러들였다. 燕支山 아래에서 高昌國王, 伊吾 吐屯設 等 西域 27個 國家의 국왕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고, 다시 觀風殿에서 문물을 대대적으로 갖추어 놓고 高昌國王 麴伯雅, 伊吾國 吐屯設 等을 이끌어 연회를 베푸는 등 隋의 부유함과 강성함을 과도하게 내보였다. 이 결과 隋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서역 여러 나라에서 使臣을 보내어 조공했고, 煬帝도 적극적으로 교역에 힘써서 멀리 페르시아까지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했다.
隋煬帝 서북 변강에 대한 이와 같은 포용ㆍ개방정책은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고, 서역과의 교류는 세계제국 唐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또 세계사적으로 볼 때 동서 문명교류의 단서를 여는 것이었다.
Emperor Yang of Sui's Administration the Western Countries of Ch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