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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02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 - 33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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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은 강제성을 지니기 때문에 경ㆍ론에 비해 전역이 늦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외래문화가 異域에서 뿌리 내리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道安은 한지에 初傳되었다는 安世高의 󰡔義決律經󰡕은 長阿含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장아함이 법장부의 것이라 보면, 이 계통의 율전은 일찍부터 한지에 유전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율전에 의거한 수계는 조위시기 曇柯迦羅가 󰡔僧祇戒心󰡕을 전역하고, 담제나 강승개 등이 법장부의 갈마법을 역출한 이후이다. 당시는 각 부파간의 율장에 공통점이 많았고, 한인들의 율전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대립의 소지가 적었기 때문에 계본과 갈마가 혼용되고 있었다. 5세기 초부터 남북지역에서 광율들이 전역되었다. 󰡔십송율󰡕이 최초로 전역되어 널리 수용되었지만 隋末唐初가 되면 󰡔사분율󰡕이 점차 대세를 이루었다. 󰡔사분율󰡕의 전역에 대해서는 「四分律序」와 僧肇의 「長阿含經序」가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승조의 기록이 더 타당한 것 같다. 비록 412년에 󰡔사분율󰡕이 완역되었지만 북방에서는 6세기 초반까지 󰡔마하승기율󰡕이나 󰡔십송율󰡕의 영향이 더욱 강하였다. 법총는 北臺에서 최초로 󰡔사분율󰡕을 口述로 講釋하였다. 그는󰡔담무덕갈마󰡕로 수계하고 󰡔승기율󰡕을 닦았지만, 이후에 󰡔사분율󰡕로 전향하였다. 道覆은 법총의 강율을 듣고 최초로 ‘義疏’를 찬술하였다. 이것은 단편적인 찬술로 광대한 宗旨를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의소를 통해 󰡔사분율󰡕을 선양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들의 법맥을 낙양과 업성에서 유전시켰던 것은 慧光이다. 혜광은 소림사의 佛陀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불타는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혜광은 도복의 󰡔사분율소󰡕를 口傳 받았다. 불타가 전한 율부는 충분하지 않아서 혜광은 처음에 󰡔마하승기율󰡕을 강의하였다. 하지만 혜광이 실제 명성을 얻은 것은 󰡔사분율󰡕의 홍포 때문이다. 효문제 이래로 불교도의 모반이 잇따르자 승속 양측에서는 보다 강력히 불교계를 통제야만 했다. 󰡔사분율󰡕의 전수자 혜광은 도유나가 되어 승속의 이익을 중제하면서 서서히 승단을 장악하였다. 혜광의 문하에서는 다양한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法上ㆍ慧遠ㆍ洪遵 등은 승관직 수행으로, 道雲ㆍ道暉ㆍ法礪ㆍ智首 등은 학승으로 주목된다. 전자의 홍준은 󰡔승기율󰡕이 대세였던 관중에서 󰡔사분율󰡕의 교세 확장을 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후자의 율사들은 혜광의 義疏를 본받아 자신의 의소를 찬술하였다. 특히, 지수의 󰡔五部區分鈔󰡕는 도운의 疏를 바탕으로 각 율의 異同을 궁구하여 그 폐립을 정하였다. 도선은 지수의 疏를 토대로, 법려의 疏를 참조하여 󰡔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12권)󰡕를 찬술하고, 남산율종을 개창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기존에 유행했던 󰡔십송율󰡕은 왜 󰡔사분율󰡕로 대체되었는가? 첫째, 승단 스스로가 敎界를 엄격히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5세기가 되면 불교계의 급팽창과 사원경제의 비대화로 교계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둘째, 세속 통치자들의 정치적 필요도 있었다. 연속된 전쟁과 가혹한 수탈로 백성들이 국가 호적을 이탈하여 사원으로 도피하였다. 또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불교계의 반정부활동이 지속되었다. 남북을 불문하고 통치자들은 강력히 교단을 통제하고, 사원경제력을 국고로 귀속시키고자 했다. 셋째, 불교계 내부의 사상적 변화이다. 5세기 이래로, 북방에서는 대승경전이 성행하였다. 특히 󰡔사분율󰡕의 기반이 된 󰡔十地經論󰡕이 유행하였다. 또한, 실천성의 강조로 ‘治塔’을 중시하여 불탑이나 사리탑신앙이 성행하였다. 여러 광율 가운데 󰡔사분율󰡕만이 불탑과 관련된 조항을 갖추고 있어 승단과 세속 통치자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세속 통치자들은 승단을 통제하는 방편으로 더욱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였다. 6세기 중반부터는 󰡔사분율󰡕이 통치자의 지지를 받으면서 사분율승이 북방의 승단을 장악해 갔다. 그 결과 사분율승이 동위 이래로 승단을 이끌었고, 隋末唐初가 되면 북방에서는 󰡔사분율󰡕이 점차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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