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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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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40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167 - 209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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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 윤증과 덕촌 양득중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들이다. 특히 명재는 86세로 세상을 떠나기 이전까지 조정으로부터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김집과 송시열 등으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양명학에도 밝았으며, ‘무실(務實)’을 강조하여 실학적 측면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학문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덕촌 양득중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양득중은 숙종 때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벼슬에 나아간 이래 영조에게 ‘실사구시’의 정신을 강조한 인물로 유명하다. 백성들의 현실적 삶이 조정의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으나, 당시 경연에서는 아직도 주자어류를 핵심 교재로 강론을 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영조에게 주자어류 대신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힘써 공부할 것을 권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은 영조가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정치를 펼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양득중의 그런 학문적 성격은 스승 명재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윤증과 양득중은 스승과 제자간이었으나 삶의 방식이나 태도는 달랐다. 그러나 진리 추구에 있어서는 열린 마음과 자세를 보여 주었다. 명재는 덕촌에게 개방적 태도로써 동료적 대우를 하였고, 덕촌은 스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이와 같이 진리 추구에 있어서 개방적인 자세를 보여 주었던 점은 당쟁이 치열하였던 당시 학문 풍토에서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본령에 정통하면서도 양명학이나 실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워 현실에서 적용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도 두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이다.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넘어 교학상장하는 실질적인 학문적 태도를 보인 것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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