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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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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9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375 - 40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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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는 사임당(師任堂)의 태교(胎敎)로 영특하고 천재성(天才性)을 타고 났거니와 지극히 인간다움이 이미 유아기에 천성(天性)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3살 때에 말을 배우면서 글을 깨치고 다섯 살 때에는 ‘천부(天賦)적인 효자’로 소문난 것이 그 것이다. 여섯살이 되면서 사서(四書)등 유교경전을 모친인 사임당으로부터 직접 배워 일곱살때에는 이웃사람이고 친척이며 권세가인 진복창을 비판하는 이른바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순(純) 한문(漢文)으로 지었는데 유교경전을 배웠기때문에 공맹사상을 이해하고 있었기때문에 정의관(正義觀)에 입각한 판단으로 실행한 것이다. 그러한 뛰어난 문장력으로 여덟살 때에는 파주의 고향집인 뒷동산에 이른바 「화석정시(花石亭詩)」도 지어냈다. 11세 때는 부친의 위독으로 신령께 기도를 드린 결과 “지성감신(至誠感神)”으로 신령이 나타나서 아버지 이원수에게 계시한 것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율곡은 효(孝)의 방법으로 공부를 잘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여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장원하였다. 16세 때에 이르면서 평소에 유학을 가르쳐주시고 따뜻한 마음(心)과 사랑(愛)을 심어준 어머니 사임당의 죽음은 율곡가(栗谷家)에는 큰 충격이 아닐 수없다. 율곡은 상례와 제례는 주자가례에 따랐으며 여묘(廬墓)와 심상(心喪)과 관례까지 모두 마치고 모친의 죽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한양의 강남에 있는 봉은사에 가서 불교서적(佛書)을 읽고 불교의 생사설(生死說)에 관심을 갖고 19세 되던 해의 봄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억불친승(抑佛親僧)의 입장을 취하면서 많은 스님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학술토론도 하였다. 혹은 불경(佛經)을 논하고 혹은 선(禪)을 실수(實修)하였다고 한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여 선학(禪學)과 접하게 된 것은 본래 효심의 발로에서 유발된 것이만 율곡의 성리학과 선학의 만남은 결국은 철학적 동기로 진입(進入)하여 궁극으로 성리학으로 선학을 탐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율곡이 비록 잠시나마 불교에 귀의했다가 하산(下山)했지만 전국적으로 유림(儒林)들로부터 공박을 받았지만 모든 사물을 대립과 반목으로 보지 않고 원융(圓融)과 통합(統合)으로 지향하는 불교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들여서 그의 학문의 바탕인 유가철학을 보다 크게 발전시키는 큰 그릇(大器)으로 만들어 주는 소중한 인연이 아주 좋은 계기가 되어 동방의 우뚝한 사상가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인식케 하려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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