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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포은학회 포은학연구 포은학연구 제6권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63 - 9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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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공양왕 옹립이후 정몽주는 태조 이성계-태종 이방원 부자와 정도전ㆍ조준 등과 사활을 걸고 대립하였지만 결국 선죽교에서 피를 뿌리고 제거당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거부하였던 신왕조, 즉 조선조에 ‘以身殉國’한 충절과 儒宗으로 추숭되어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화려한 부활을 하였다. 조선전기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대에서 세종대까지 不事二君한 충절의 표상으로서의 정몽주상이 정립되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정몽주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어 중종대에 정몽주의 문묘종사가 이루어졌다. 세조의 쿠데타와 중종반정, 연이은 사화로 인해 군신 간, 신하 사이에 대립, 갈등이 노정되는 상황에서 태조-태종 부자와 정도전ㆍ조준 등의 개혁파와 반목을 하면서 끝내 태조를 제거하고자 하였던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정몽주는 우리나라의 원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褒奬하고 존숭하여야 綱常이 크게 밝아집니다”라고 한 권벌이나 “정몽주가 태조에 대하여 이와 같이 해를 입혔으니,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과연 원수와 같다. 그러나 지금으로는 이 사람을 褒奬한 뒤에야 나라의 規範을 세울 수 있다.”고 한 중종의 인식은 태종이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한 태종의 인식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강상과 나라의 규범을 확립하는데 정몽주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림파에 의하여 고조되었던 節義와 명분론은 17세기 인조반정과 호란을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면서부터 더욱 숭상되었다. 결국 여말의 변절자와 15세기의 훈구파가 격하되고 상대적으로 왕조교체기에 ‘不事二君’의 정몽조ㆍ길재와 같은 절의파와 세조등극을 반대하던 인사가 숭앙의 대상이 되자 17세기이후 사족들은 자기 선조를 그러한 충절과 결부시켜 국가적 포숭을 받고자 하였다. 그런 목적하에서 자신의 선조를 정몽주와 연결시키고 또 정몽주의 후손의 발탁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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