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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61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125 - 163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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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대외관계에서 외교관의 활동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조선과 러시아는 1884년 7월 7일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서울주차 초대 러시아공사인 베베르가 조선에 부임하여 비준을 교환한 것은 1885년 10월이었다. 1년 이상 서울주차 러시아 외교대표의 직책이 공석인 상태에서 러시아는 이른바 ‘제1차 한러밀약사건’을 비롯하여 ‘거문도 점령사건’ 등을 경험했다. 위의 두 사건에 대한 조선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던 러시아는 묄렌도르프의 한러밀약 제안과 관련하여, 1884년 12월 슈페이예르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는 공식 외교사절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파견되었으나, 조선의 국왕을 알현하는 등 외교적 행보를 취했다. 이후 1885년 거문도 점령사건 및 한러밀약의 연장선에서 슈페이예르의 2차 내한이 이루어졌다. 2차 방문 당시에도 슈페이예르는 개인의 자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군사교관단의 조직에 관하여 묄렌도르프에게 불어로 문서를 작성해 주었으며, 조선의 대신들을 상대로 외교적 성격의 담판에 임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의 이런 행동으로 러시아의 대조선 정책이 공격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이런 상황에서 베베르가 조선에 부임했다. 훈령에 따르면 그에게 하달된 명령은 평화적 방법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과 거문도 점령사건의 해결이었다. 베베르가 선택한 것은 고종 개인의 고문 역할이었다. 모든 조선의 국내외 문제를 상의해 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선의 내정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제2차 한러밀약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베베르의 활동으로 러시아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상이 긍정적으로 제고되었으며, 조선 국왕 또한 러시아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게 되는바, 훗날의 아관파천도 당시 형성되기 시작했던 신뢰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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