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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대동문화연구 제102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85 - 246 (6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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尒朱榮은 六鎭의 난과 六鎭 降戶의 난(杜洛周・鮮于脩禮・葛榮), 關隴의 莫折太提・莫折念生 부자의 난으로 어수선한 사이 肆州・幷州・恒州 일대의 胡人들을 병합하여 세력을 키웠다. 尒朱榮은 六鎭의 난 이후 큰 피해를 입은 北魏 병력의 근간인 雁臣 집단의 일부와 北邊・六鎭의 胡・漢 세력을 흡수하고 肆州・幷州 일대를 지배하는 군벌로 자립하였다. 胡太后가 孝明帝를 살해한 기회를 이용하여 洛陽으로 진격하여 胡太后와 2천여 명의 관리를 죽이고(河陰의 變) 권력을 장악하였다. 尒朱榮의 반감을 품은 孝莊帝는 永安 3년 九月 戊戌日(530.11.1) 尒朱榮이 비무장 상태에서 궁전에 들어오자 복병을 두었다가 尒朱榮과 아들, 정치적 파트너인 上黨王 元天穆 등을 살해하였다. 尒朱榮은 六鎭의 난 이후 발생한 葛榮과 万俟醜奴 등의 반란을 평정하여 혼란을 수습하였고 政局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北魏가 六鎭의 난 이후 붕괴되었다는 개설서와 통사류의 서술은 지나치게 생략한 잘못된 서술이다. 尒朱榮과 尒朱榮 사후 집권한 尒朱兆 등의 정권, 즉 尒朱氏政權은 5년(528~532)만에 망한 단명한 정권이었다. 또 尒朱榮의 부하들이 후에 西魏北周와 東魏北齊를 세우는 핵심 지배층이 되었다는 점에서 北朝後期 政局에 끼친 영향이 컸다. 이 논문은 六鎭의 난은 단기간에 柔然에게 진압되어 北魏末 政局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증명하였다. 또 雁臣 집단의 붕괴와 洛陽의 北魏軍이 내란과 梁의 침입에 동원되었던 상황이 尒朱榮의 발호 원인이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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