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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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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문서학회 古文書硏究 古文書硏究 제50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75 - 96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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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이학조 검안>자료를 통해 19세기말 정의로운 폭력과 그 한계를 논의하고 있다. 전남 광양의 동학교인 이학조는 1894년 광양군의 양반 조용하의 시신에 총포를 쏘아댔다. 조용하가 자신의 동료 유수덕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한데 대한 복수였다. 시신에 총을 쏘는 행위는 당시의 유교적 가치관에 반한 차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조용하의 아들 조윤태는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했고 드디어 1897년 이학조를 체포하여 구타 살해했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인정과 도리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라고 항변했다. 시신을 훼손한 ‘차마할 수 없는 일(不忍人之心)’을 저지른 순간 동학농민군의 <거의(擧義)>는 힘을 잃고 말았다. 동학이 민중적 헤게모니의 맹아를 보였던 이유는 그것이 기왕의 지배이데올로기가 강조하던 ‘인간의 도리’를 선취하고 이를 통해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섰기 때문이었다. 시신에 총을 쏘는 행위는 유교의 세속화가 진행되었던 19세기말 인정과 도리를 넘어선 부정의의 폭력일 뿐이었다. 과연 의로운 폭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조윤태 역시 아버지의 시신을 훼손한 이학조를 재차 복수 살해하면서 의로운 폭력을 내세웠다. 정부는 법으로는 살인을 허용할 수 없었지만, 도리와 인정에 비추어 사형 대신 ‘장60’의 처벌을 조윤태에게 내렸다. 19세기 말 조선에는 인간의 도리와 인정에 부합한다고 주장되는 수많은 폭력들이 난무했다. 폭력에 앞장선 이들은 <차마할 수 없는 모욕>에 분노하면서 스스로 <차마할 수 없는 폭력>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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