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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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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30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9 - 43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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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봉암과 해인사와의 인연을 이해하는데 목적이 있다. 해인사는 스승 용성의 본사였으므로 봉암은 일찍부터 이곳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생애에서 해인사는 수행과 전법, 그리고 교화를 펼친 가장 중요한 사찰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봉암의 전 생애를 일별하고, 용성의 해인사에서의 활동과 봉암의 수행과 포교가 해인사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자료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용성이 직접 제작한 옥석 호계첩, 봉암의 친필 엽서, 해인사 시절 사진 등의 몇몇 자료를 새롭게 찾을 수 있었다. 끝으로 해인사에서 봉암에게 가르침을 받은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봉암의 위상을 이해하였다. 봉암은 스승 용성의 뜻을 이어 해인사에서 전법에 매진하였다. 1938년 서른의 나이에 법보학원의 강사가 되어 교학을 펼쳤다. 해인사는 20세기 들어 보통학교 등의 근대교육을 활발하게 추진하였고, 전통 강원 또한 가장 많이 운영하는 등의 교육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봉암은 1955년까지 18년 동안 강사로서 후학양성에 큰 업적을 남겼다. 강원의 강사가 본사 주지보다 더 존경받았던 시절 봉암은 󰡔초발심자경문󰡕, 󰡔금강경󰡕, 󰡔능엄경󰡕에 이르는 다양한 교학을 전수하였다. 1944년에는 산청포교소의 주지, 1948년에는 영림공사의 상무를 맡는 등 사판의 소임에도 충실하였다. 봉암에게서 교학을 배운 여러 수행자들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커다란 동량이 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를 ‘유명한 강백’으로 평가하였다. 1955년 정화운동의 와중에서 봉암은 해인대학의 교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이후 1970년까지 15년간의 해인대학 교수 시절 봉암은 해인사에서처럼 여전히 교학을 전수하고, 포교에 매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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