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한문고전학회 漢文古典硏究 漢文古典硏究 제20권 제1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7 - 48 (4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江西詩派 시집이 간행되고, 강서시파 수용 양상이 확대되면서 성종 연간에는 강서시파라 이를 만한 인물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는 朴誾, 李荇, 朴祥, 鄭士龍, 盧守愼, 黃廷彧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중 노수신은 해동강서시파의 일원으로, 강서시파의 鼻祖인 황정견의 “以俗爲雅” 이론을 가장 조선적으로 體現 시킨 사람이다. 소재는 강서시파의 특징인 拗體의 變容을 통하여 慷慨한 기상을 표출하고 있다. 또한 비속어, 속담, 지명, 이름 ,간지, 일시 등을 과감히 시어로 구사함으로써 優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以俗爲雅”의 경지를 보여 줌으로써 허균이나 홍만종 등 여러 비평자 들의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句의 조직에 있어 實字와 虛字를 적절히 안배하여 도치된 어문을 통하여 어세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박은, 이행등과 더불어 實字에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 典故의 활용을 통하여 새로운 의경을 창출하고 두보 시의 문맥에서 쓰인 시어를 조합하거나 차용하거나 부분적으로 문자를 바꾸어 意境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였다. 또 문장을 배열하면서 의경을 적절히 안배하여 기⋅승⋅전⋅결의 격식을 갖추도록 하였다. 노수신은 宦路에 들어선지 3년 만에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2년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여 학업에 충실하고 規矩로서 몸을 단속하여 큰 재목으로 기대 되었으나 정치적 격변을 맞은 것이다. 그의 유배는 정치와의 단절로 인한 인고의 시련기였으나 역설적으로 그 기간 두보와 논어를 이천 번 이상을 읽어 두보에 관한 神韻을 얻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고 논어 등의 여러 책을 섭렵 하여 해박한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당시 기존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에 정면 도전하여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는 「困知記拔」⋅「夙興曖昧箴」⋅「執中說」⋅「人心道心辨」 등의 논문을 유배기간에 발표하여 이황, 기대승, 김인후, 이항등과 수차에 걸쳐 논변하였다. 그의 철학은 기존의 주자학과는 이질적인 나정암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류들로부터 禪學과 異端에 찌든 학자라는 비판을 받기도하였다. 그의 작품 1,449首 중 1,023首가 유배지 작품이다. 내용은 1) 이별의 情恨과 至親에의 향수, 2) 지기와의 神交를 통한 삶의 위안, 3) 절망의 초극과 학문에의 침잠, 4) 忠君 愛民과 交隣의 정 등으로 구분된다. 소재의 삶은 후반기의 정치적 영광은 차치하더라도 시문학사와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해동강서시파의 일원으로 두보를 가장 조선적으로 체현시킨 공로 외에도 송시의 산문성, 기교주의에 반발하여 음악성과 서정성 을 회복하기위한 시적지향으로 唐詩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海東江西詩派의 뒤를 이은 최경창, 백광훈, 이달 등에게 학당의 이론을 전수시친 향도적 역할을 했던 중심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45)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