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형주 (경희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39집
발행연도
2019.7
수록면
281 - 317 (37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역대시조는 중국에서 한대 이후 ‘고제왕’ · ‘선대제왕’의 명칭으로 요 · 순 · 우 · 탕 · 문 · 무왕 등을 제사하였는데, 전대의 제왕 중에 좋은 평가를 받았던 대상을 제사하였고, 당대 이후에는 사전에 중사로 등재하였다. 역대시조 중 태조대부터 주목을 받았던 대상은 고려시조와 단군, 기자였다. 그렇지만 고려의 왕씨는 1394년(태조3)의 ‘이흥무<SUB>李興茂</SUB>’ 옥사 사건이후 그 후손들이 흩어졌고, 이후 단군과 기자에 관심이 쏠렸다. 최초로 기자, 단군, 고려시조가 사전에 등재된 것은 1413년(태종13)이었고, 이때는 고려와 달리 당대 이후의 중국사를 본받아 이를 중사<SUB>中祀</SUB>로 설정하였고, 신위도 그에 맞추었다. 그러다가 1426년(세종8)에 이르러 삼국의 시조가 시조묘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관련규정이 설정되어 후에 『세종실록』오례와 『국조오례의』에 그 내용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1461년(세조6)에 이르러 국왕은 단군, 고구려시조, 기자의 사당에 나가 친히 제사를 행하였다. 이때의 왕의 친제는 조선왕조에서 최초로 시행된 것이고,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의례적 조처로, 세조대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단종대에는 공주에 살던 왕우지를 찾아내어 왕순례<SUB>王循禮</SUB>라고 사명<SUB>賜名</SUB>하고 고려시조에 대해 ‘숭의전<SUB>崇義殿</SUB>’이라는 전호를 사용하였는데, 이후 왕순례-왕천계로 이어지면서 숭의전부사로 제사를 시행하였다. 또한 성종대에는 황해도의 역병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구월산의 ‘삼성사’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공식적으로 역대시조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다.
16세기까지 ‘역대시조묘’의 인식이 숭의전에만 ‘전<SUB>殿</SUB>’의 칭호를 붙였지만 17세기 이후 기자사<SUB>箕子祠</SUB>를 ‘숭인전<SUB>崇仁殿</SUB>’으로 고치고, 단군의 사당이 숭령전<SUB>崇靈殿</SUB>으로 불리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전기에는 설정되지 못하였던 삼성사<SUB>三聖祠</SUB>가 평양의 단군사와 더불어 제사의 대상이 되었고, 경종3년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사당을 숭덕전<SUB>崇德殿</SUB>으로, 영조원년에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신사를 숭령전<SUB>崇靈殿</SUB>으로, 정조19년에 백제시조 온조묘를 숭렬전<SUB>崇烈殿</SUB>이라고 고침으로써 1795년까지 기자, 단군, 삼국시조, 고려시조의 사당에 대하여 ‘전<SUB>殿</SUB>’호를 칭하였다. 그리고 이후 고종대에 이르러 김수로왕, 미추왕, 탈해왕 등에 대해서도 전호를 부여하였는데, 이같이 시차를 두고 역대시조를 정리한 것은 조선왕조가 중요시 여겼던 대상이 시대마다 달라진 것이며, 이를 올바르게 제사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목차

요약
머리말
1. 『세종실록』오례에 수록된 ‘역대시조묘’
2. 세조대 ‘역대시조’의 친제와 『국조오례의』
3. 조선후기 역대시조의 묘호殿號 상신과 그 운영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9-911-001239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