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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정훈 (초당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71輯
발행연도
2020.4
수록면
33 - 55 (23page)
DOI
10.31335/HPTS.2020.04.7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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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후반에 백제는 북으로 고구려, 동으로 신라, 남으로 침미다례라는 적대적인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침미다례는 전남의 해안방면에 있던 나라였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숙적인 高句麗와 대결하기 위해, 369년 3월에 먼저 침미다례를 쳤다. 이때 백제는 침미다례를 남만(南蠻)으로 불렀다. 이 점은 백제가 고구려와 연결된 침미다례를 적대시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5세기에 건립된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東夷)로 불렀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신라는 고대국가로 도약하고 있었다. 따라서 침미다례가 남만으로 불렸다는 것은 상당한 세력을 가진 나라였음을 의미한다.
한편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살펴보자. 366년과 368년에 백제의 사신이 신라에 갔다. 그럼에도, 신라는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점은 신라가 백제의 우호 관계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그리하여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대결에 앞서 후방의 우환이 될 수 있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369년 3월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격으로 백제와 신라는 긴장 관계로 들어섰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370년대와 380년대에, 신라가 백제의 숙적인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백제는 신라의 친고구려 노선으로 인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신라와의 국경지역에 배치했다. 이는 침미다례의 지배자들이 영토를 회복하는 데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369년 9월에 백제는 고구려와 전투를 했다. 371년에, 백제는 두 차례의 전투 후에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다. 이 무렵부터 백제의 전력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침미다례의 지배층은 완전히 국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백제의 침미다례 공격
Ⅲ. 백제, 신라의 대결과 침미다례
Ⅳ. 백제, 고구려의 공방과 침미다례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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