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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계승범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57輯
발행연도
2020.4
수록면
163 - 196 (34page)
DOI
10.37981/hjhrisu.2020.04.57.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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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재위 전반기(1680~90년대)에 일련의 복권조치를 단행했는데, 그 압권은 노산군 복권이었다. 이는 230년이 넘도록 잊을만하면 등장하던 뜨거운 감자를 국가 차원에서 국왕이 적극적으로 해소한 역사화해 조치였다. 특히 폐주를 국왕으로 복권하여 그 위패를 종묘에 들이는 일은 기존의 왕통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중차대한 조치였다. 왕조 국가에서 왕통을 재조정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국가 정체성과 정통성을 재정립하는 중대한 정치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숙종의 의도에 대해서는 대체로 군신 의리에 입각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이라는 설명이 주를 이룬다. 다만, 왕권 강화 욕망은 국왕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본능이다. 따라서 숙종의 왕권강화책이라는 설명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국왕들은 왜 노산군 복권에 미온적이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즉, 왜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노산군에 대한 복권이 가능했는가,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삼전도항복(1637)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왕조를 재건해야 했던 시대적 요구에 착안하였다. 삼전도항복의 충격으로 사대부의 인심이 흩어지고, 인조의 항복을 금수만도 못한 패륜으로 간주하는 정서가 심해지던 17세기 중・후반은 그야말로 왕조의 크나큰 위기였다. 효종은 그것을 북벌론으로 타개하려 했지만, 16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청질서가 확고해짐에 따라 북벌론은 시의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대내용 정치선전 기능마저 잃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1674년에 즉위한 숙종으로서는 북벌론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이 절실하였다. 이때 숙종의 생각이 바로 왕통의 흠결을 메워서 재정립하는 것과 그동안 사림의 숙원이던 노산군 문제의 완전 종결이었다. 숙종과 신료들은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과 노산군의 무고함도 인정해야 하는 딜레마를 절충과 타협으로 풀었다. 한편으로는, 세조의 정통성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국가의 왕통에는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국왕 숙종의 이해관계에 따른 결과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산군이 무고한 피해자임을 숙종이 인정하였다. 이는 사림의 숙원을 국왕이 공식적으로 풀어준 셈이었다. 이로써 노산군은 단종이라는 묘호를 추증받아 정식으로 조선왕조의 제6대 국왕으로서 종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왕과 사림이 서로 한 발씩 양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서로 ‘윈-윈’하는 선에서 대타협을 성공시킨 사례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노산군 관련 논의의 장기 추이 패턴
3. 1690년대 복권조치의 시대적 환경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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