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우진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실학학회 한국실학연구 한국실학연구 제40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513 - 542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논문은 1703년 강희제가 숙종에게 하사한 어필로 촉발된 조선의 정치적 파장과 숙종의 대응 양상에 주목하였다. 이 어필은 강희제가 50세가 되면서 태평성대를 이룬 것을 기념하기 위해 숙종에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청이 내린 번봉국을 대대로 지키며[藩封世守], 멀리서 복종하고 삼가 공손한[柔遠恪恭]’ 조선 국왕을 치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숙종은 예기치 않은 강희제의 어필에 곤혹스런 상황을 맞이했다. 특히 황제의 어필을 국왕이 傳受할 때 ‘先後四拜’를 할지 ‘起立․跪’로 할지를 둘러싸고 청과 조선 사이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다행히 조선측의 의견이 수용되어 ‘起立․跪’로 무마되었으나, 이어서 칙사가 개인적으로 숙종에게 강희제의 어필을 주려고 함으로써 양측 사이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더해 칙사의 요구에 대응하고 전송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신하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해이해진 기강도 숙종을 난처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국왕의 위신은 크게 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숙종이 선택한 것은 바로 關王廟, 宣武祠, 그리고 大報壇으로 대표되는 대명의리의 표방이었다. 그는 이곳에 대한 갑작스런 방문과 祭禮 등을 시행함으로써 화제를 전환시키고 어필을 둘러싼 파장을 잠재웠다. 그리고 조선이 섬기는 대상은 청이 아닌 명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으며, 그 주체가 바로 국왕임을 신료들에게 상기시켰다. 즉, 이를 통해 그는 군신간의 위계질서와 기강을 재확립하고, 왕조의 정통성과 국왕의 위신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