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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7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15 - 269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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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간도 5·30에 관한 한국인들의 의식은 식민지 시기 구축된 간도 5·30상에 영향 받은 것이 적지 않다. 식민지 시기에 그것은 ‘비민족적인, 즉 중국 공산당 주도의 폭력과 파괴의 폭동’으로 재현·표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간도 5·30은 ‘조선의 운동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 직후 간도 5·30 소환물은 간도를 한국인에게 역사적으로 ‘가까운 지역’으로 재현하면서, 간도 5·30의 주체들을 현재의 한국인들과 같은 ‘조선 동포·민족’으로 민족화하였다. 민족주의적으로 의미화된 간도 5·30은 그것의 역사화 과정에서 인민·대중 중심적으로 표상되고 또 그러한 관점에서 의미화되었다. 즉, 간도 5·30은 일본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된 항일무장투쟁의 정초(定礎)가 된 대중적 무장 투쟁으로 표상되고 또 그와 같이 역사화되었다. 간도 5·30의 민족 역사화는 식민지 시기 구축된 간도 5·30상, 즉 ‘비민족적인, 파괴와 폭력의 폭동’상을 탈식민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식민시기 한국인의 피의 투쟁’의 결과로 식민지 해방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식민지 해방이 연합국의 승리로 가능해졌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자신들의 당혹스러운 처지를 해소하는 정치적 효과를 가진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과거 식민시기 제국의 질서 안에서 비(非)․탈(脫)민족화된 조선인을 민족적 주체로 구성/생산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공산주의자 등 당대 좌익이 민족적 헤게모니를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자원을 생산하였다는 의미 또한 가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간도 5·30상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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