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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38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43 - 17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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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세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 지역사회 주도세력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사족들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에는 임진왜란당시 사족들의 전쟁중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선산지역은 초기 사림파들의 전통이 16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선산지역은 일본군이 퇴각하는 1593년 5월까지 일본군의 점령지였다. 선산지역의 주민들은 일본군에 협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선산부사 정경달과 최현·노경임 등 의병들은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맞서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선산 사족들의 의병활동은 전쟁이 종식된 후 향촌에서 그들의 주도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헌 장현광을 중심으로 하는 선산지역의 사족들은 전쟁이전부터 학문적 공동체를이루고 있었다. 여헌 장현광은 한강 정구의 질서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학문적 명망이있었으며, 의병으로 활동하였던 장제원, 노경임 등을 문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산지역의 전후 복구는 여헌학단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산지역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된 것은 선산의 중심서원인 금오서원의 복설이었다. 금오서원의 복설과정에서 전대의 節義人들을 추향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적지로 들어가분탕된 선산·인동지역의 사림들은 전대의 절의인을 崇獎하여 표본으로 삼고자 하였기때문이었다. 장현광은 이러한 서원 제향인물의 확대에 대하여 반대하고 ‘道學’을 서원향상의 기준으로 고수하였다. 선산지역은 적의 점령지였기 때문에 특히 부역자들이 많았던 문제가 있었다. 이를해결하기 위하여 장현광은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장현광의 향약실시 주장은 장현광의 문인인 노경임의 「향중완의」, 장경우의 선악적 실시 주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선산·인동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전쟁의 혹독함을겪은 경상도 사족들은 무엇보다도 刑政을 비롯한 국가적 질서의 정비보다는 향촌단위에서 교화를 통한 인륜의 회복을 더 우선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교 중심의 소복책을추진한 인물들은 선산·인동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장현광의 문인집단이었다. 이들은금오서원을 중심으로 사족의 구심점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향약을 실시하여 ‘士族’들이주도하는 향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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