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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준호 (경찰대학)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58輯
발행연도
2020.8
수록면
159 - 191 (33page)
DOI
10.37981/hjhrisu.2020.08.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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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誠一은 경인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失報誤國’했다는 것과 전란 대비를 위한 축성공사에도 반대함으로써 전쟁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전란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김성일에게 전란의 책임을 물어 治罪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柳成龍과 光海君의 伸救에 힘입어 김성일은 경상우도 招諭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을 거점으로 도내에 招諭文을 반포하고, 이로와 조종도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의병 창의를 이끌어 냈다. 김성일은 창의한 의병장들에게 군령권을 부여하고 지휘 체제를 확립하면서 관군과 의병을 절제하였다. 그 결과 1592년 7월 이후 관군과 의병들이 경상우도 지역을 차츰 수복하였다. 특히 현풍・창녕・영산이 수복되면서, 김성일은 경상우도를 넘어 경상좌도에까지 초유 활동 범위를 확대하였다.
1592년 10월 김성일은 배후에서 전술운용과 수성군의 배치를 통해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을 막아내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승첩을 보고하고, 전투 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는 목민관으로 경상우도의 민심 수습은 물론 이후 전란 대비를 위한 방위 체제 확립과 군량미 확보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593년 4월 김성일은 역병에 걸려 진중에서 사망하였으나, 그는 선조에게 경상우도 초유사와 관찰사로서 보여준 공로를 인정받아 嶺南을 再造한 충신으로 평가받았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초유 활동과 경상우도 수복 지역의 확대
3. 임진왜란 초기(1592 5월~1593. 4월) 경상좌·우도의 동향과 전시행정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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