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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미선 (명지대)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0호
발행연도
2020.12
수록면
177 - 20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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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訥祗王代 불교를 수용했던 신라 왕실은 炤知王 때 사금갑 사건을 계기로 불교를 배척하였다. 이로 인해 6세기 법흥왕대에 가서야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 5세기 상황을 보면 안으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컸지만 밖으로 고구려의 영향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고, 백제와의 동맹을 강화하며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사금갑 사건은 이렇게 대고구려관계가 변화하는 시점에 발발하였다. 그렇다면 눌지왕대 불교 수용이나 소지왕대 불교 배척 또한 고구려와의 관계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5세기 신라의 대고구려정책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것이 왕실의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고찰하였다.
눌지왕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즉위하여 고구려의 간섭 하에 있었으며, 복속의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등적 관계 속에서 고구려의 문물로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고구려 승려들은 국경지역인 일선군뿐 아니라 왕실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후 자비왕은 국경지대에 대대적인 축성을 단행하며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고, 왕경에서 고구려 군사를 몰아내기도 했다. 이에 소지왕은 백제와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고구려에 맞서는 공세적 자세를 취하였다. 한편 안으로 소지왕은 乃宿을 국정에 참여시키며 정치적 쇄신을 단행하였고, 그 일환으로 신궁을 설치하여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어 내전 분수승과 사통한 궁주를 주살함으로써 왕실에서 불교를 축출하였다. 이러한 신궁과 사금갑 사건을 통해 소지왕이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것은 시조 숭배였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고구려와의 예속관계 속에서 받아들인 문물로 인식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불교 또한 배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5세기 신라 왕실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교리나 사상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대외관계의 매개체 및 문물로 인식하는 단계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눌지왕대 대고구려관계와 불교 수용
Ⅲ. 소지왕대 고구려관계의 변화와 불교 배척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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