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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미선 (명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46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5 - 38 (34page)
DOI
10.31218/TRKH.2022.6.1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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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법흥왕의 불교 공인이 가능했던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지증왕의 즉위와 활동에 주목하였다. <냉수리비>에 의하면 지증왕은 즉위 후 4년까지 갈문왕을 칭하고 있어 왕위계승이 순탄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소지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어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지증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눌지왕의 딸’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눌지왕 때 공주의 치병을 계기로 왕실에 불교가 수용되었는데, 지증왕의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로 왕실의 불교 신봉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지증왕 또한 불교에 우호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지증왕은 모량부 박씨 왕비를 맞이하는데 모량부 박씨 세력은 친불교적 세력으로, 법흥왕은 이러한 부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지증왕의 친불교적 성향은 순장 폐지에도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지증왕은 소지왕 때 설립된 신궁을 계승하였는데, 신궁은 시조 혁거세를 제사 대상으로 하였다. 지증왕은 박씨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신궁 제사를 통해 왕비 세력과의 결합을 굳건히 하고, 왕위계승의 정당성도 얻을 수 있었다. 신궁을 통해 왕실을 중심으로 제사를 일원화함으로써 사상적 통합을 꾀할 수 있었고, 이후 법흥왕은 신라 통합의 새 사상으로 불교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한편 소지왕 때까지 고구려와의 충돌이 빈번했으나 지증왕, 법흥왕 때에는 전혀 없었다. 이는 지증왕이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한 것으로, 왕의 친불교적 성향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신라사회의 고구려 및 불교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는데도 기여했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 위에 법흥왕이 불교 공인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법흥왕대의 불교 공인과 중고기라는 새로운 시기는 친불교적 성향을 가진 지증왕의 즉위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러한 연속성에서 볼 때 지증왕계를 설정할 수 있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지증왕의 즉위 과정
Ⅱ. 박씨 왕비 세력의 등장
Ⅲ. 지증왕대 정치사회적 변화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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