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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인호 (광운대학교)
저널정보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歷史와實學 第74輯
발행연도
2021.4
수록면
103 - 135 (33page)
DOI
10.31335/HPTS.2021.04.7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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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는 농업 발전과 농민의 안정을 위해 권농에 노력하였다. 고려는 태조대부터 중농 이념을 펼쳤으며, 즉위 교서에서 궁예의 문제로 농업의 적절한 시기를 빼앗는다고 하였다. 그 결과 삼농을 빼앗지 않는 것이 권농의 핵심이었다. 권농은 ‘물탈농시’를 원칙으로 천인합일에 의한 유교적 농업관에 바탕을 두었다. 수령 등의 관료와 지역 세력가 등은 쓸데없는 역역 동원을 자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물탈농시’의 농업관은 인간 노력에 대해 수동적이다. 국왕의 수덕 행위는 인간 심리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그 결과 권농 주체인 수령 오사의 첫 번째는 농지 개간 규정을 넣었다. 이후 조선왕조는 적극적인 권농의 주체로서 역할을 해야 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상업의 역할을 나름 중시하였다. 특히 숙종은 화폐 진흥책을 통해 사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공방전」과 같은 반발이 있었지만 상업 자체를 억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불교 승려의 사회적 존재가치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성리학 수용 이후 승려, 상인은 사회 정의를 해치는 존재로 인식되었지만, 상업과 공업을 없애는 것 대신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주자학은 지식습득에서 『대학』의 격물치지가 선행되어야 했다. 농업 지식은 격물치지의 수단이기에, 선비의 경우 지식이 필요하였다. 이전의 이규보는 농업 지식이 개인적 관심이었지만, 고려말에는 지식 보급을 위해 농서를 간행하였다.
민에 대한 인식 변화는 과거 농민의 존재가 관료나 지식인에게 통치의 대상이었다면, 고려말 이후 농민은 사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도전의 유배나 농촌 은거 지식인이 증가하면서 이 관계는 직분 상의 차이라고 보게 되었다. 성리학에서는 동일한 품성을 지니는 인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은 통치 대상에서 벗어나 도덕적 함양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 배경에는 고려후기 이래 농업생산의 발전과 자영농의 성장이 뒷받침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농업에 대한 인식과 ‘물탈농시(勿奪農時)’
Ⅲ. 상업에 대한 인식과의 비교와 그 변화
Ⅳ. 고려말 농민관과 권농의 변화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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