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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대회자료
저자정보
康志賢 (全南大)
저널정보
대한일어일문학회 대한일어일문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 요지집 大韓日語日文學會 2021年 春季國際學術大會 [4개학회 공동개최]
발행연도
2021.4
수록면
138 - 142 (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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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 「2세 짓펜샤 잇쿠」가 된 이토이가, 에도를 벗어나 도피한 1837년 이후 지방에 있어서의 저작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습명」이라고 하는 문화 속에서 명적(名跡)이 박탈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토이의 간략한 연보 및 전기 구축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작업을 마무리 짓는 본고에서는, 30대 후반 이후의 사본에 대하여 서지학적 시점으로 상세히 논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견해를 얻을 수 있었다.
에도에서 2세 잇쿠로서 활발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었던 이토이는, 에도를 떠난 1840년 초가을, 고향에서 고칸 『모미지노니시키 아카기모노가타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고향을 떠난 뒤 원조를 받게 되는 치타(知多)의 거상(豪商)을 위하여, 1841년 봄에 닌죠본 『닌죠 하루노마사유메』와, 같은 해 겨울에 고칸 『하나모미지 타카라 노야마우바』를 집필한다. 그러나 이 세 작품은 결국 출판되지 못한다.
한편, 불교설화를 강독하기 위한 자료로 집필했다고 여겨지는 성립시기 미상의 「무카시바나시」를 통하여 그의 만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이토이 관련 이름이 나오는 저작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잇쿠로서의 그의 명적(名跡)은 생존 중 박탈되어졌으리라는 것, 불상사를 일으킨 경우 명적이 취소되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음을 논한 바이다.

목차

Ⅰ. 緒言
Ⅱ. 江戸を離れてから、天保十一~十三年成立の作品
Ⅲ. 剥奪される名跡
Ⅳ. 結語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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