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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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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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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2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261 - 29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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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산성(보은) 공방전의 고찰을 통해,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논란 또한 검토해 보고자 하였다. 검토를 위해 경주지역의 고고학적 성과인 묘제를 살펴보았다. 이들 묘제의 검토로 신라 3성 왕계가 서북계 고조선 유민과 관련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으며, 와산성 전투가 발생하게 된 배경 또한 검토할 수 있었다. 김씨계는 서북지방에서 이주한 유민집단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에 진입하면서 화령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보은과 화령을 잊는 교통로에 와산성과 구양성을 축성하였다. 백제의 보은 진출과 와산성 공격은 김씨계 알지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탈해왕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알지를 사로 연맹에 받아들이며, 자신의 왕계 유지를 위한 동맹으로 삼으려 하였다.
와산성 공방전 이후, 신라는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소국들을 간접 지배에서 점차 군을 설치하는 직접 지배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전환은 백제의 지속적인 소백산맥 교통로 확보 노력 때문이었다. 신라는 화령과 추풍령 교통로를 확보하고, 소백산맥을 통해 천혜의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와산성 공방전 이후, 추진된 신라의 소백산맥 방어선 구축노력은 250년 전후, 사량벌국의 멸망과 함께 이루어진다. 250년 이후, 신라와 백제의 전투는 주로 소백산맥 일대에서 전개되며, 신라는 백제를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와산성 공방전 이후, 신라의 소백산맥 방어선 구축은 470년 보은 삼년산성과 474년 보은 주변 자성들의 축성으로 완성이 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와산성 공방전의 배경
Ⅲ. 와산성 공방전의 전개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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